지금까지처럼 모험 일지 한 장에 여정 하루씩을 담는다고 치면 20챕터 넘는 분량이 더 이어지게 될 텐데, 남은 작업 분량 또는 연재 주기를 딱히 고민하지 않고 시작한 것 같다. (공정히 말하자면 그걸 고민했을 시 그냥 작업 시작이 더 늦어지기만 했을 거다 내 성격에) 그래도 일주일에 하나씩은 써야 맞지 않나? 지난 글이 올라가고 보름 넘게 지났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하지만 나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모험 일지 2는 2주 전 일요일에 업데이트 되었는데, 그것을 올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면, 허리가 아팠다. 요즘은 주로 책상 놔두고 식탁 앞에 앉아 작업을 하는데, 이게 왜 문젠가, 큰맘 먹고 산 좋은 사무용 의자 대신 척추나 골반에 대한 큰 고민 없이 설계했을 식탁 의자 위에서 수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거다. 해서 모험 일지 2를 업데이트한 일요일 나머지 시간은 하루 종일 드러누워 보냈다. 그러다 밤에 좀 괜찮아져서 놀다가(주로 게임을 했다는 의미), 다음날, 월요일 아침 날이 다 밝은 후에 잠들었다. 그리하여 오후 2시로 예약해 두었던 영어 과외 펑크내고 오후 3시쯤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모친도 바람맞혔다. 요약하면 일기 한 번 쓰고 사람이 폐급이 되어버렸다는… 그러니까 나로서는 조금 부끄러우면서도 억울한 얘기일 수밖에. 아무도 고료를 주지 않는 산문을 지나치게 열심히 쓰다가 허리도 아야 하고 몸 핑계로 빈둥대다 사회적 실수도 연속으로 저지르고… 그랬으니 제가 이 시리즈를 마저 쓰고 싶겠습니까?
의외로 (나 자신에게 가장 뜻밖이다) 쓰고는 싶었다. 줄곧 쓰고 싶었고 계속 쓰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 쓰기 싫은 쪽보다는, 쓰기 무서운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가깝게는 일단 쓰다가 허리를 아야 했으니 또 안 그러리라는 법 없다는 이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어쩌구 하는 속담도 있지 않나. 마땅한 대안이 없으므로 나는 또 자라 위에 앉아야 한다. (왜 좋은 사무용 의자를 쓰지 않죠? 그건 글쎄… 왠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앉느니 허리 한번 더 아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큰 이유가 없는… 유아적인 고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층 더 심대한 차원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정직하게 기록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 이 여정의 4일차부터는 본격적인 북투어가 시작되는데 그때부터는 내가 아닌 등장인물이 무척 많아진다. 모두 실존인물(맞죠?)이지만 그들 모두에게서 좋은 인상만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쓸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실존인물인 등장인물 얘기를 하니까 떠오르네, 모험 일지 2를 올리고 안톤 허 선생님(본문에서는 서구식으로 존칭 없이 쓰고 있지만 오프닝(?)에서까지 그럴 수는?)과 디엠을 조금 주고 받았다. 작가님 그렇게 고생하신 줄 몰랐다는 다정한 말씀을 해 주시길래 잠깐 생각(모험 일지 2까지의 내 고생 서사는 슬랩스틱 1인극 같은 느낌이 있지 않나, 아직 어떤 본격적인 사건-갈등도 없고 내가 나 스스로를 고생시켰다는 차원에서)한 후에, 제 고생은 다 제 멍청 비용 지불이라서 괜찮다고 답변드렸다… 안톤 허 선생님은 장차 모험 일지의 주요 등장인물이 될 분이기도 한데, 바로 그 분이 이 글들을 읽어주고 계시다는 게 굉장히 의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 일화를 (글과 관련된 짤막한 안부 주고받음 뿐이지만) 모험 일지 3의 도입으로 삼을 생각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여러분 모두 읽으셨다시피 그후 허리 아야 사건이 터져서 이 계획의 실행은 이토록 연기되었고.
갈수록 오프닝이 길어지는군. 막상 3일차에 한 일/일어난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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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정말 난처하게 했던 첫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이 디테일에 대해서도 약간은 화가 나지만… 다른 버라이어티한 단점들과 비교하면 그저 귀여운 수준이라 하겠다.
일단은 일찍 일어났다. 28인치 캐리어 들고 그 좁아터진 계단 내려갈 거 생각하니 내 힘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자원, 이를 테면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나 복병 등장, 지난 모험 일지에서 미리 말했듯 건조기 일체형 세탁기에 말려둔 빨래가 여전히 촉촉한(그나마 축축까지는 아닌) 상태였다. 이때 내가 내린 판단과 실행들-한마디로 개삽질난리부르스쇼를 굳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다.
결론만 말하면 나는 오전 10시 1분에 아직 숙소 안에 있었고, 노크 소리를 들었다!
마침 나는 현관문 앞에 있었다. 9시 58분쯤 다 잠가놨던 캐리어를 눕혀 열고 빨래랑 헤어드라이기를 허둥지둥 싸넣고(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상상이 가시죠) 체크아웃 1분 넘길 때마다 추가금 같은 것이 부과되지 않을지 불안해하며 부랴부랴 나가는 중이었다. 그때껏 내가 겪은 런던은 그 정도로 차씹도 같았고, 나는 베일 만큼 높지도 않은 코를 양손으로 가리지 않으면 불안을 가누지 못하는 시골쥐라서… 안 그래도 레이트 체크아웃 차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노크 소리를 들었으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딱 1분 넘겼다고 혹시? 경찰을? 불렀나? … 라는 생각까지는 안 했다. 하지만 문 밖에 있는 사람이 나한테 돈 내놓으라고 할 것 같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만약에 지금 런던 경시청에서 “그날 그 시간 그 주변에서 심각한 범죄가 있었고 당신이 목격한 그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니 인상착의를 말해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해도 나는 크게 도움 되는 증언은 못할 것이다. 아시아계 여성이었던 것은 기억난다(나와의 공통점이어서). 그런데 그가 입고 있던 집업과 레깅스가 룰루레몬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같은 것은 조금 헷갈리고, 집업이 회색이고 레깅스가 핑크색이었는지 그 반대인지도 생각이 잘 안 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온 몸에 딱 달라붙는 두께감 있는 운동복 차림의, 나보다 키가 약간 작아보이는 아시아인 여성이었다는 점. 말하자면 옆집 현관에서 “헤이, 애니(가명), 오늘도 조깅하러 가요?” 하고 소리 높여 인사하면 에어팟을 잠깐 빼고 쾌활하게 손을 흔든 다음 정원을 가로질러 거리로 달려나갈 것 같은 생활 체육인 타입의… 거의 정수리 가까이 깔끔하게 올려 묶은 검고 긴 머리가 말총처럼 탄력있게 흔들릴.
체크아웃? 체크아웃.
대략 그런 단순한 상호작용 후에 상대가 문 안으로 들어오고 내가 밖으로 나갔다. 혹시 저 레이트 체크아웃… 돈 내야 하나요? 2분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같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봤다가 진짜 내야 하면 낭패인지라, 그냥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계단으로 짐을 끌다 문득 그 사람은 아마도 주인이 아니라 룸 메이킹을 위해 찾아온 사람일 거라는 추정을 했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왼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으니까, 만에 하나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휴대폰 메모를 참고해 비밀번호를 누르려 했다는 듯이. 잠깐 마주친 사람이지만 체력과 정신력이 두루 탄력있어 보이는 사람이라 런던에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 어떤 일? 인가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다. 물론 상상에 집중하기는 힘들었다. 도합 30킬로그램 정도 되는 캐리어, 백팩, 크로스백을 계단으로 옮기는 중이라.
도와줄까요?
조금 후에 룸메이드가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이때 나는 겨우 반 층도 움직이지 못한 상태였다. 도와줄까요? Do you need help? May I help you? (여기에 You okay, honey?까지) 는 내가 짐을 옮길 동안 정말 여러 번, 수많은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었지만 거의 매번 나는 잇츠오케이 아임오케이 아이캔핸들잇이라 대답하고, 방금 전까지의 끙끙댐은 마치 연기였다는 듯 캐리어 손잡이를 양손으로 번쩍 치켜올린 후에 우오오~~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곤 했다. 딱 한번, 내가 기억하는 한, 딱 한번은 도움을 거절할 수 없었는데 이때가 바로 그때였다. 왜냐하면 그 건물의 계단은 한번에 두 사람이 지나다니지 못할 만큼 좁았고, 그 좁은 계단을 나와 내 캐리어가 막고 있었는데, 아마도 룸메이드는 현관에 볼일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여 내가 손잡이를 잡고 상대가 캐리어 아랫부분을 잡은 채로, 마치 커다란 짐승을 붙든 두 사람이 짐승의 힘을 못이겨 끌려가는 듯한 기세로 계단을 내려왔다.
나와 상대가 계단에서 보낸 시간은 길어야 2, 3분 가량이었지만 현관에 도달한 우리는 둘다 땀에 젖어 있었다. 상대는 잠깐 숨을 고른 후에 현관문 안쪽에 놓여 있던 커다란 검정색 백팩을 어깨에 뀄다. 여행인가요? 행운을 빌어요. 상대가 먼저 인사했고 나도 인사했다. 고마워요. 당신도요. 사실 나는 더 길게 말하고 싶었는데, 뭐냐하면, ‘당신도 당신같은 사람만 만나길 바라요’. 그런데 내가 이 문장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제로 발화할 수 있는지(나는 모국어 대화에서도 가끔 느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를 재고 있을 동안 다리가 튼튼하고 발이 가벼운 상대는 이미 1층 층계참을 돌고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지금 일하는 중이지. 뜻하지 않게 일하는 사람의 시간을 지나치게 빼앗았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워졌고 그걸 내 죄책감, 잘못, 실수 같은 걸로 여기기보다 그 사람의 가벼운(마음이 가볍다는 것이 아니라, ‘이쯤 베풀어도 나는 끄떡없음’의 가벼움) 호의로 받아들이며 고마워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거리로 나온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레스터 스퀘어 역과 피카딜리 서커스 역, 어디에서 전철을 탈 것인가. 목적지는 워털루 역. 두번째 숙소로 이동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두번째 숙소와 가장 가까운 역은 사실 사우스워크 역이지만 워털루 역에서 도보로 이동하는 걸 선택했고…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일일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바보짓이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지.
가는 길 자체는 기분이 좋았다. 첫번째 숙소에서 피카딜리 서커스 역으로 가는 길, 런던 차이나 타운 곳곳의 작은 광장에서 레인보우 플래그와 트랜스 프라이드 플래그를 봤는데 그건 언제나 나에게 환대의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이 주변 구역은 (첫날 경유한 딘 스트리트와 달리) 캐리어를 끌기에 나쁘지 않은 포장 상태기도 했다. 전날 밤이나 새벽쯤 비가 왔는지 물웅덩이도 종종 있었는데 거기에 비친 런던 하늘과 프라이드 플래그들은 상큼하고 낙관적인 느낌이었다. 음 좋아 좋아. 나의 런던 여행은 이제부터인 거지. 대충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 잠시 후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 도착해 그건 너무너무 오래된 역이어서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없다는 걸 깨닫고서도 큰 타격을 못 느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유 오케이 허니? 계단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 내게 머리를 화려한 천으로 감싼, 나보다 키가 30센치정도 커 보이는 여성이 물었다. 실은 그 여성 이전에도 두세 사람 정도 내게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는데 그 사람의 인상착의만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그때에야 캐리어 들고 계단 내려갈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걱정한 것은 체크인 시간이 오후 3시인데, 내가 호텔에 도착할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은 늦어도 11시 반, 그러면 ‘뜨는 시간’동안에 뭘 하지? 였다. 참고로 내가 목적지에 실제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를 넘겨서였다. 대체 난 뭘 걱정한 걸까?… 그렇다기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까?
일단 워털루 역에서 길을 잃었다. 이건 온전히 내 탓만은 아니라 하고 싶다. (그럼 누구 탓? 꼭 책임 주체가 명확한 사고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세상 일이라는 것이…) 워털루 역은 체감상 서울역보다 컸고 그중 몇몇 구역은 출퇴근 시간대와 붐비지 않는 시간의 운영 방향이 다른 등 생각지도 못한 함정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이용해야 하는 출구는 워털루 기차역이 아니라 워털루 전철역(메인 플랫폼에서 두 층 정도 내려가야 있는) 쪽에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몰랐던지라… 역 전체를 크게 세 바퀴 정도 돌았다. 소요 시간은 대략 40분 가량? 중도에 택시 승강장이 있는 출구를 발견해서 아… 그냥 택시 탈까… 를 한~~~참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타지 않았다. 런던 물가(특히 택시비)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 당장의 피로를 압도하기도 했지만, ‘이건 분명 쉬운 문제일 것이다’, ‘이까짓 위기도 해결 못 하는 인간이 혼자 뭘 할 수 있을 리 없다’라는 생각이 끝내 이긴 거였다.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하자면 이날 이 시간대에 워털루 역 산책을 한참 한 덕분에, 이후에도 종종 재방문해야 했던 워털루 역에서 더는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오전 11시 경은 그 커다란 역이 비교적 한산한 때이기도 했으니… 요즘(사실은 조금 지난) 말로 럭키비키였던 거지.
어렵사리 역을 빠져나온 다음으로는 그냥 걷기만 하면 되었다. 캐리어 끌고 한참(개인적으로는 공항에서 런던 시내로 올 때보다 더 많이)(왜? 역 안에 앉아서 쉴 공간이 거의 없어서)(밥이라도 먹지 왜? 여기까지 참은 김에 호텔 근처에서 마음 놓고 맛있는 것 플렉스하고 싶어서) 걸은 다음이어서 체력 소진이 심해 ‘그냥 걷기’ 자체가 그렇게 가볍게만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길을 아니까, 필요한 건 시간뿐이었으니까, 모든 것이 괜찮게 느껴졌다.
이때 호텔까지 걷는 동안 목격한 인상 깊은 것 세 가지. 사람은 원래 잘 모르는 것을 처음 접할 때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첫번째는 동포 여성들. 워털루 역을 빠져나와 첫 담배를 피우고 걷기 시작했을 때 밝은 색 트렌치 코트를 입은 여성 두 명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거의 정확하게 들린 모국어-“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걔 매운 거 잘 먹어?” 실은 바로 전날, <마틸다>를 볼 때도 자녀를 동반한 한국인 부부를 봤다. 즉 런던에서 한국어 듣기? 그렇게 신기한 경험은 아니다. 이 도시는 좌우간 엄청나게 큰 국제도시이고 당연히 인종 다양성도 대단하니까. 단적으로는 나(조차)도 여기 와 있는데 다른 한국인이 쏘다니는 게 무슨 이야깃거리이랴. 그래도 그 여성들은 내 또래로 보였기에 좀더 반갑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들 대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계속 엿들으려 하면 실례가 된다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아무리 걸음을 재촉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거리는 순조롭게 벌어졌고 언젠가부터 그 여성들은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나는 너무 무거운 가방을 든 지친 사람이라서…
아무튼 이어서 두번째, ‘오세요Oseyo’ K-마트. 영국 전역에 체인을 둔 K푸드 및 아시안 식료품점인 듯한데, 동포 여성들을 뒤따라 걷다가 (일부러 따라간 게 아니라 경로가 겹쳐서…) 워털루 역 인근에서 처음 보았다. 낯선 곳에서 내가 잘 아는-그중에서도 전통적인 뭔가를 발견할 때 왠지 웃기고 쑥스러워지는 게 시골쥐 감성인지라 별수없이 웃었다. 사진도 찍었다. 친구들한테 카톡으로 보냈더니 친구들도 웃었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겨운 법이잖아.
마지막 세번째, 호텔 인근 영 빅 시어터(Young Vic Theatre)에 걸린 <슬론 씨 대접하기Entertaining Mr.Sloane>의 대문짝만한 포스터. 워털루역에서 오세요 마트까지는 직진, 거기서 좌회전을 하면 일단 올드 빅 시어터가 보이고, 그 방향으로 직진을 하면 영 빅 시어터가 나온다. 빅Vic은 아마도 빅토리아의 줄임일테니 왕립극장일테고, 빅토리아극장에 구관도 있고 신관도 있다는 것은 더더욱 왕실 지원이 있다는 의미로 보이고, 신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아마도 좀더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일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봐도 하얀 빤스 차림 다갈색 피부의 남성이 백인 할저씨 할줌마에게 둘러싸여 있는 진홍색 배경의 포스터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무슨 이야기일까? 중노년 중산층 백인 부부가 젊고 섹시한 유색인종 청년을 중심으로 오픈 메리지 생활을 시작하다 파국에 이르는 이야기? … 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합류한 일행에게도 이 추측을 말씀드렸는데 질색팔색하셨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포스터에 나온 중년 배우들은 부부가 아니라 남매 배역이라 한다.
영 빅 시어터를 지날 즈음 나는 꽤 지쳐서, 얼리 체크인 차지를 지불하고 한 시간 정도라도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대로 계속 걸어 사우스 워크 역을 지나면서 와, 거의 다 왔어, 라고 혼자 만세만세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거기서부터 한 7분 더 걸어서 도착한 숙소에는 퀴어 프렌들리 표시가 되어 있었고(숙박업계에서 공식 사용하는 아이콘 같은 게 있었다) 그걸 봤을 때 나는 또 마음이 찡해져서(체력이 달려서 심적으로도 자극을 쉽게 느끼는 상태가 된 것 같다) 얼리 체크인 차지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갔는데… 컨시어지에 체크인 문의를 하자 호텔 스태프 가로되, 오 우리 호텔은 물론 유료 얼리 체크인이 가능해요, 그런데 당신, 호텔을 잘못 찾아왔네요. 뭐라고요? 우리 호텔 사우스워크 지점은 여기가 아니에요. 여기는 사우스워크 ‘테이트 모던’ 지점이에요. 뭐라고요? 그러니까 여기는… 나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뭐라고요 말고는 할 말이 없었을 뿐…
로비에서 잠깐 울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울 때와 똑같이 목울대가 위아래로 당겨지는 듯한 묵직한 통각을 느끼긴 했지만 눈물은 (아마도 수분 부족으로) 나지 않는 상태로 잠깐 쉬고, 다시 길을 나섰다… 호텔 스태프의 조언대로라면 내가 원래 갔어야 하는 호텔은 영 빅 시어터와 매우 가까웠다. 그 구간을 지나쳐올 때 야한 연극 포스터에 정신팔릴 게 아니라 메일을 한번 더 체크해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후회한들 어쩔 수 없지. 오후 1시를 조금 넘은 시점에 나는 두번째 호텔에, 이번에는 진짜로, 도착했다.
호텔은 사우스워크 컬리지라는 대학 건물 뒤편에 있었고, 호텔 입구까지 가는 길 주변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신경을 꽤 기울인 듯한(그야말로 ‘영국적’인 꾸밈이 아닌가?) 녹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 이 호텔은 영국 여러 지역에 지점을 둔 괜찮은 비즈니스 호텔 체인으로 (이미 말했듯 나는 이 호텔의 지점이 도보 10분거리 이내에 두 군데나 있음을 몸소 확인한 참) 자체 품질 관리 기준을 둔 침구류가 특히 호평이고 (내가 곧 소개할 일행의 경우 이 호텔의 매트리스에 진심으로 탄복하여 구매를 알아보았지만 그게 또 만만치는 않은 가격이라 그냥 알아만 본 걸로… 하셨다고) 여러 편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객실 내 미니 냉장고는 없었다…) 얼리 체크인도 물론 편의 서비스 가운데 하나였지만 다섯시간 일찍 체크인하나 한시간 일찍 체크인하나 가격이 같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냥 호텔에 잠시 짐을 맡기고 식사를 하고 오기로 했다.
숙소 주변 지역은 일종의 대학로이기도 해서인지 형식미 있는 식당, 그러니까 비즈니스 미팅이나 연애 초반 데이트를 하기에 손색 없어 보이는 공간이 제법 많았다. 그중 어디서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친구들과 카톡도 하고 애인과 화상통화도 했다. 녹지 비율이 높은 지역이라서인지 음쓰통마저도 넉넉할 것마냥 팬시한 레스토랑들의 영향인지 청설모가 많았다. 처음엔 앗 청설모다 귀여워, 했고 그 다음 봤을 땐 쟤가 언제 저기까지 갔지? 했고 세번째 목격할 즈음에야 아 청설모가 한두 마리가 아니구나 깨달았다.
한참 고민한 끝에 내가 선택한 식당은 튀르키예 요리점. 차지키 소스, 쿠스쿠스, 닭꼬치가 포함된 1인 런치 코스를 골랐다. 런던에서의 오피셜 첫 외식이야! 하고 호들갑떨며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냈는데, 영국 첫 식사인데 결국 영국 요리가 아니었군… 생각하면 조금 우습지만 영국에서의 외식 경험은 원래 그렇다고 한다. 가격은 차치하고 아무튼 인도 요리면 인도 요리, 베트남 요리면 베트남 요리, 세계 어느 나라 어떤 장르의 요리든 런던에서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과연 정말 그런가? 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나는 꽤 괜찮은 태국 요리를 런던에서 맛보게 된다…) 이때 내 옆 테이블에는… 막상 쓰려니 조금 조심스럽지만, 기왕 솔직하게 쓰기로 마음먹은 김에 그냥 쓰자면,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 듯한 흑인 여성 두 명이 앉아있었는데, 그들은 손가락을 따각따각 튕기거나 목을 아이솔레이션 동작으로 끊어 연신 움직이는 등의 제스처도 막 쓰고 말 두 마디에 한 번꼴로 흐킁~냑! 하고 코 먹는 웃음소리도 내며 진짜 재미있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미있어 죽겠는 대화인 건 확실했다… 말하자면 그들, 내가 미디어에서 많이 보아온 ‘유쾌하고 말빨 좋은 언니들’ 스테레오 타입이었다고 할까.
런던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영국 레스토랑에서는 절대로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면 안된다는, 그것은 너무나 심각한 실례라는 내용의 숏폼 영상을 꽤 많이 보았기에 잠자코 잘 있었는데, 계산서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의 매너가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쳤으니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는 신호를, 내가 먼저 눈으로 보내 종업원이 다가오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옆테이블 여성들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종업원이 먼저 계산서를 갖다주었다. 내가 주문한 요리가 막 나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는데, 최종적으로 그들보다 내가 먼저 그 식당을 떠났다…
옆자리 사람들 떠올리느라 막상 런던에서의 첫 외식이 어땠는지는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군. 생각보다 합리적인 가격(런치코스 15파운드 선)으로 이국적이고 본격적인 코스요리를 맛봐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차지키 소스를 제대로 먹어본 것도 이 때가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첫 입은 조금 미심쩍었지만 먹다보니 중독성이 있었다. 치킨 사테이? 아마 메뉴판에는 다르게 표기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한 닭꼬치 요리…는 대략 알 만한 맛이었다. 사진을 보고서도 예상이 되었고 예전에 먹어본 적도 있는 맛. 그리고 라이스 푸딩. 맞아, 이게 정말 맛있었다. 유리한테도 얘기했다. 유리야말로 20대 언젠가 맛보았던 마음에 쏙 드는 라이스 푸딩을 아직도 그리워하며, 어지간한 레스토랑에서는 무조건 라이스 푸딩을 하나씩 시켜먹어보는 사람이라서. 식사하는 동안에는 주로 친구들과 대화를 했지만 곧 합류하게 될 일행과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작가님, 저는 이제 비행기를 탑니다. 저녁 같이 드실까요? 연락 상대는 내가 소속된 티씨에이전시의 박진희 대표님.
여기서 한번 존칭 표기 문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가야겠다.
내가 모험 일지에서 안톤 허를 안톤 허라고 쓰는 이유는 이후 나오게 될 크리스를 크리스라, 트라미를 트라미라 쓰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외국어 이름이라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안톤은 한국인이고 나는 한국어 대화에서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한편 안톤 허는 번역문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름이기도 하다. (내 모험 일지에 등장하지 않는) 김혜수를 배우님이 아니라 그냥 김혜수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유명인의 이름은 일반명사로 인식된다는 의미. 한편 박진희 대표님의 경우 한국인이시고, 나와 거의 100% 한국어로 상호작용을 하시고 (안톤 선생님의 경우에는 실제 상호작용보다 작품으로 더 많은 대화를 한다는 점이 다르다) ‘대표님’ 말고는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모험 일지에서는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진희’라고 써 보려 한다. 존칭 문제는 내가 북투어 일정을 수행할 동안 현지 출판사 사람들하고 동행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던 왓츠앱 채팅방에서의 작은 혼란을 되새기게도 한다. 영어로는 진희, 안톤이고 한국어로는 대표님, 선생님인 혼란. 나는 여기에서 크리스를 사장님이라 쓰지 않을 것이고 트라미나 미라에게 붙여야 하는 한국어 존칭이 무엇인지 떠올리지 못한다. 글 안에서 존칭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그 인물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다. 이 모험 일지에 등장하는 독자인 안톤과 진희가 이 결정을 이해해주기를… 물론 그냥 싸가지 없는 짓거리라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제 마음대로 그렇게 하듯 선생님과 대표님도 마음 가는 대로 하셔야 맞지요.
진희는 내가 영국에 오기 며칠 전 먼저 출국하여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일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도서전과 <Capitalists Must Starve> 북투어 일정이 마침 가깝고, 나는 진희의 회사에 소속된 작가들 중 처음으로 해외 북투어를 진행하는 작가이며, 나 개인에게도 이것이 첫 해외 북투어라 도움이 필요할 것. 우리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런데 나는 항공권료와 숙박비를 번역원으로부터 (출판사를 경유하여) 지원받은 상태였지만 진희의 경우… 물론 진희는 나의 공식 에이전트지만, 북투어에서는 그냥 자발적 동행인이지 공인된 지원대상이 아니라서, 진희는 순수하고 정직한 사비로 체류비를 감당해야 했다. 이 지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물론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여기까지 보신 분들 대부분 눈치 채셨겠지만 나는 감사함과 송구함을 그렇게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데 진희가 이런 출혈을 감당할 만큼 이 책이, 이 북투어의 성패가 중요하다는 점,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여기서 말하는 그게 제 작품이기도 해서 제 입으로 말하기가 약간은 민망한데요) K문학이 의미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우리 함께 힘을 모으자는 결의이기도 하다는 것, 그런데 그런 좋은 의의들과 별개로 나 자신은 약간… 에이전트가 하나하나 챙겨주어야 하는 철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미묘하게 못난 마음. 아마도 첫 사흘간의 우당탕탕이 마지막에 언급된 못난 마음에 강한 영향을 주었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쨌든 진희가 와 주는 것이 그저 너무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안심이 되어서 내가 좀 못난 사람인들 어떠냐는 생각을 했다. 못났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게 좋다는 건 모르고.
하여간… 적어도 숙박비를 절감하는 차원에서 진희는 나와 숙소를 공유할 예정이었고, 진희가 런던에 도착하기 전에 내게는 몇 가지 해 두고 싶은 일이 있었다.
첫째, 물론 숙소 체크인. 이건 뭐 점심 먹고 3분쯤 걸어가서 체크인하고 싶다고 말만 하면 끝이지만.
둘째, 간단한 외투 한 벌 구입하기. 야상 점퍼, 외투 겸용 데님 원피스 두 벌이 있었지만 둘 다 긴 옷이고 두께 자체는 얄팍한 편이어서 밖에 오래 있으면 몸에 냉기가 스몄다. 진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그맘때의 영국은 춥다는 경고를 여러 번 했지만 나는 그리 귀담아 듣지 않았고, 막상 현지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끼기에 런던 날씨는 춥다기보다 차가웠다. 애초 나는 추위를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남한에서 가장 추운 고장 출신이라서. (최근 트위터에서 “북한에서는 강원도가 가장 따뜻합니다”라는 말을 봤다. 재미있는 관점이다.) 겨울에 나는 종종 나를 ‘추위코패스’라고 소개한다. 바깥을 함께 걷는 친구들이 어우 추워 아우 추워, 할 때마다 “추워?” 하고 (굳이) 묻는다. 공감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어조로. 그럼에도 10월 말 런던 기온?이랄지 대기는 뭐랄까, 사람을 점점 둔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종류의 싸늘함을 품고 있었기에 뭐라도 좀 껴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옷에나 받쳐 입을 수 있는 보통 길이의 가디건이 가장 합리적이고 활용도 높은 선택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셋째, 한복 다림질. 다음날에는 북투어의 첫 공식 이벤트가 있었다. 짐이 너무 많고 무겁고 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즉 첫째날부터) 내가 대체 왜 한복을 고집스레 챙겨왔을까 후회했지만, 그래, 바로 다음날 같은 때에 입으려고 굳이 가져온 거였다. 그럼 기왕 입는 거 잘 입어야 보람이 있겠지.
첫번째와 세번째는 모두 숙소에서 해결 가능한 일이었고 숙소에는 무료 대여 다리미와 다림판도 있었다. 냉장고도 없는 호텔에서 다림질 도구 일습이 무료 대여 가능하다는 사실은 나에게 영국의… 유럽의… 어떤 속성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사실처럼 느껴진다. 품위있게 정돈된 옷차림이 호텔 방 안에서의 요기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문제는 두번째. 일단 어떤 가게로 가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고 오늘 3일만에 제대로 된 밥 한 끼 사 먹었는데 옷은 이렇게 막 사제껴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밥값이 그러할진대 옷값은? 이라는 생각도…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게는 북투어 일정 동안 컨디션을 적절하게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껏 언급하기를 잊고 있었는데, 진희는 나에게 마스크도 끼고 다닐 것을 조언했고 나는 그 조언을 따랐다. 진희가 내게 그런 조언을 한 이유는 런던이 정말 생각보다 다국적 다인종 대도시라서였고, 그건 즉 COVID19 감염성도 서울에서보다 크다는 의미. 멀리 갈 것 없이 진희 본인이 그 전해인지 전전해 런던 출장 직후 코로나 확진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잠깐의 조사를 거쳐 올리버 보나스 워털루 역 지점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결정에 영향을 준 자료는 어떤 영국 워킹 홀리데이 메이커의 블로그 포스팅이었는데, 영국에 와서 좋아하게 된 가게이며 가게를 통째로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감상이 인상적이었다. 마침 워털루 역은 이미 헤맬 대로 헤매고 온 다음이어서 비교적 부담없이, 하물며 지도 어플을 켜지 않고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고 올리버 보나스도 (그 몇 시간 전까지는 정확히 뭘 하는 가게인지 알지 못했지만) 오전에 몇 번 보아 대강 위치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각오도 다졌고, 어디로 갈지 조사도 했고, 밥 거하게 먹고 숙소에서 조금 쉬어 체력도 제법 회복했으니 빨리 출발해야 하겠지? 진희가 도착하기 전에 쇼핑도 다녀오고 다림질도 하려면 아무래도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점에 나는 호텔에서도 한번 길을 잃었다…
바보짓을 고백하고는 그게 내 탓만은 아니었다 변명하는 패턴이 자꾸 반복되어 민망하지만, 물론 여기에도 그럴 만한 연유는 있었다. 일단 내 숙소는 B1, 즉 지하 1층에 있었다. 기이하게도 창문 밖은 햇빛이 들어오는 중정이라 엄밀히 말하면 지하층이 아니긴 했는데, 건물을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까?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도 실제로 방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곳이 완전히 지하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기에, 카드키를 받고서, 음? 호텔에 지하 객실도 있나… 이거 혹시 인종차별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대기도 했다. 이걸 따져야하나 말아야하나 하며 일단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나랑 같은 층에 묵는 영국인 가족을 봐서 딱히 나한테 조건 나쁜 방을 준 건 아니구나, 하며 납득했고… 아무튼 방이 지하에 있다보니 그냥 복도를 걷다가 제일 먼저 발견하는 계단을 이용해 한 층올라가면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게 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왠지 호텔 건물과 이웃 건물 사이의 공터였다. 엥? 이게 왜 이렇게 되지, 하며 다시 계단실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 바깥쪽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밀어도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작고 네모난 공터를 한바퀴 돌았는데 호텔과 이웃 건물 사이에는 철조망과 유리조각 박힌 벽이 있어 그 사이를 건너갈 수 없었고, 멀리서 보았을 때 울타리 문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냥 벽이었다. 호텔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은 내가 지나온 계단실 문을 포함해 두 개가 있었지만 둘다 바깥쪽 손잡이가 없었다. 나올 수만 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구조의… 뭐야 이거 방탈출 게임? 을 모티브로 한 악몽? 이라는 생각을 할 법한 환경이었다. 쓰면서도 이걸 대체 독자님들이 믿어주실까… 싶어 막막한데, 지금 쓰고 있는 이 이야기가 실화라서 가장 슬픈 사람은 저예요.
그럼 나는 이 불친절하고 영문 모를 공간을 어떻게 탈출했을까? CCTV로 나를 발견한 호텔 직원이 나를 직접 데리러 와준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 두 개의 문 가운데 내게서 먼 쪽의 문이 벌컥 열리고 이리 들어오세요. 라는 목소리가 들릴 때의 기분, 그리고 열린 문으로 후다닥 달려가 마주한 그 호텔 직원의 표정. 하필이랄지 마침이랄지 내 체크인을 도와주기도 했던 직원이었다. 그는 휠체어 사용자였는데, 계단으로 올 수 없어서 그쪽 문을 열어준 듯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때는 무조건 엘리베이터만 이용하세요. 그는 나폴리탄 괴담의 규칙같은 경고를 남기고 유유히 앞서갔다. 그가 와 준 덕에 그 공터에서의 체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막상 계단실에서는 그런 안내 표지를 보지 못했기에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다소 헤맸지만 워털루 역까지 돌아가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가 보니 올리버 보나스는 과연 귀여운 가게였다. 노벨티? 라고 하던가 장난스러운 또는 재치있는 패러디 요소를 넣은 잡화류를. 그런 것도 있고, 이니셜이 예쁘게 새겨진 머그컵이나 파우치 같은 생활 소품도 있고, 빈티지 감성을 재해석한 컬러풀한 의류도 다양한 종류와 사이즈로 구비해 만화경같은 상점이었다.
아크릴 또는 리사이클 소재 가디건을 위주로 살펴 후보를 두 종류 정도로 좁히고 시착 사진을 찍어 유리에게 보냈다. 하나는 쨍한 스카이블루 색깔, 몸통 쪽에 꼬임 디테일을 넣어 짜낸 단추 가디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란 어깨 밑으로 분홍, 빨강, 다시 파랑 등의 비비드한 색깔들이 벽돌처럼 쌓여있는 집업 가디건이었다. 사실 나는 첫번째 가디건으로 거의 마음을 정한 상태였지만 계산 직전 유리가 두번째 것을 사라고 조언했다. 여행지에서 사는 패션 아이템은 조금 화려하다 싶은 걸 고르는 게 좋더라. 첫번째는 너무 무난해서 굳이 거기서 사야 할까? 싶기도 해. 두번째 것 생각보다 여기저기 잘 입게 될 것 같아. 활용도가 좋아 보여. 유리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서 두번째 것을 샀고 바로 다음날에도 입었다. 진희는 내 연푸른색 한복 치마저고리에 그 옷이 마치 맞춤한 것처럼 어울린다고, 한복 위에 그걸 걸치면 색동저고리 같기도 하다고 했다… 이 얘기는 다음 모험 일지에서 다시.
아무튼 목표한 대로 가디건을, 그것도 기대보다 귀여운 것을 사서 기분이 좀더 좋아졌다. 메인 플랫폼 층에서는 USB to C 케이블도 하나 샀다. 그 즈음이 여섯시. 호텔로 돌아와 로비에서 다리미와 다림판을 빌렸다. 한복을 직접… 은 고사하고 누구한테 다려달라 해본 적도 없구나. 덜덜 떨며 한국에서 챙겨온 다림질용 스프레이를 뿌리고 저온으로 조심조심 다렸다. 한복화섬이라는 것은 왜 이렇게 잘 구겨지는 것일까… 나는 왜 여행용 링클프리 한복이 아니라 이걸 챙겼을까… 그야 이게 내가 가진 한복들 중 가장 전통적인 디자인이고 바로 그 멋을 선보이고 싶다고 출발 전에 생각했기 때문이지. 모든 업보는 연결되어 있는 법이다. 욕심은 괴로움이 된다. 하지만 아무 욕심도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멋진 일도 일어나지 않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오전 10시 1분 노크소리를 들었을 때만큼 놀랐다. 그랬으면서도 후스데어?가 아니라 누구세요? 라고 모국어로 물었다…
작가님, 저예요.
진희였다. 앗 어서 오세요, 잠시만요… 멍청하게도 문 바로 앞에다 다림판을 펼쳐놔서 문을 열려면 다소 정리가 필요했다. 진희만 들어오는 거면 몰라도 진희가 끌고 들어올 캐리어가 있으니 문은 활짝 열려야만 했다. 조금 후에 어렵사리 안으로 들어온 진희는 나를 무척 반가워하는 것 같았… 지만 곧 심란한 기색이 얼굴을 스쳤다. 작가님, 환기를 좀 해도 괜찮을까요? 앗, 그럼요. 나는 너무 익숙해져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한복에다 다림 스프레이를 하도 뿌려서 세탁소 냄새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더더욱 농축한 것 같은 스프레이 향이 온 방에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진희는 캐리어를 성큼 넘어 침대를 지나 창문 앞에 이르른 후에, 아니! 하고 펄쩍 뛰었다.
무슨 방이 창문도 안 열려!
나는 그 방 창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좋지 못한 경향인 건 알지만, 나는 환기에 그리 민감하지 않다). 그걸 몰랐다는 사소한 부끄러움과 별개로 그게 왜 열리면 안 되는지가 순수하게 궁금했다. 고층 객실이면 안전사고나 다른 가능성… 등을 고려해 완전히 열리지 않는 창문을 만들 수도 있지. 그건 납득하겠는데, B1 객실의 창이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 구조일 이유가 있나? 스타벅스 통창도 아니고… 진희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호텔에 지하층 객실이 있는 것도 처음 들을 뿐더러, 환기도 안 되는 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을 하기에 나도 체크인할 때 인종차별 아닌지 의심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 호텔이 좀 이상한 것 같다고 나와 진희는 입을 모았다. 이상한 호텔인 걸 재확인한 김에 낮에 호텔 바깥에서 방탈출 게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얘기도 했다.
이 날이었던가, 다음날이었던가? 정확한 날짜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진희는 북투어를 위해 영국에 체류할 동안, 그중에서도 투어 일정 초반 생일을 맞이할 예정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정보들과 조합하면 진희는 자기가 에이전시 작업을 맡은 작가의 첫 북투어를 지원하기 위해 사비를 투자해 동행하는 거였다… 자기 생일에. 그러니 식사는 제가 사게 해 주세요, 하고 진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는 말은 진희가 했지만. 낮에 점심을 먹은 가게 길 건너, 간판에 조타륜이 그려진 멋진 가게가 있어서 그 가게에 갔다. 가게 안쪽은 앉을 자리가 애매한 것 같아서 밖에 앉기로 했다. 메뉴판은 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포지셔닝은 이탈리안 기반 캐주얼 다이닝 정도? 가게 안쪽 자리가 나길 기다릴 동안 나는 손님들 중 누군가 라자냐를 먹고 있는 걸 봤다고 생각했지만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확인해 보니 막상 메뉴판에는 라자냐가 없었다. 진희가 내 질문을 서버에게 전달해 주었고 (내 영어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내가 실력에 비해 너무 복잡한 문장을 말하려 한다는 점이다, 영어 실력과 모국어 실력의 차이가 대단히 심하고-보다시피-나는 안그래도 한 마디 한 마디가 불필요하게 길다) 결국 나는 라자냐와 아무 상관 없는 메뉴를 골랐다. 숙성 연어회 같은 것에 타르타르 소스? 사우어 소스? 같은 것을 곁들인 요리였고 진희가 고른 것은 육회 타다끼 비슷한 것. 진희는 가벼운 술을 한두 잔 마셨고 나는 논알콜 탄산 음료를 마셨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릴 동안에 적잖이, 그러나 유쾌하게 취한 듯한 여자 일행이 와서 이 식당에 자리가 있는지 물었다. 서버는 곧 주방 마감시간이라며 정중하게 거절하고, 주변에 당신들이 갈 만한 식당으로는 이러한 곳과 저러한 곳이 있다는 안내를 해 주었다. 저 사람들 거기 안 갈 것 같죠? 진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서버도 딱히 진지하게 말해준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 음식을 가져다 주면서 서버는 이 음식들은 이 가게 메뉴판에서 스타터에 해당하니 메뉴를 하나둘쯤 더 시키기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나는 무엇이든 괜찮으니 진희가 골라주길 바란다 했고 진희는 숙고 끝에 칩스-그러니까 영국식 감자튀김을 곁들인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스테이크 맛은 이제 별로 기억나지 않는데, 감자튀김은 꽤 인상깊었다. 오래 전 세인트 킬다 해변에서 먹었던 피쉬앤칩스의 칩스… 이게 왜 유명하지? 생각하게 했던 칩스가 생각났고, 그때는 그게 영국 전통 감자튀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유명하겠지?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서) 진짜 본토의 잘 튀긴 칩스를 먹고 보니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칩스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먹어봤는데 정말 한국 감자랑은 전분감이 다르네요. 그렇죠? 영국 감자는 확실히 튀기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짧지 않은 식사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첫 북투어의 소감, 그러니까 이제 막 시작될 여정에 대한 기대와 불안, 그밖의 우리 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 우리 둘 다 알지만 둘이 함께 만난 적은 없는 업계인에 대한 이야기 등등.
호텔 주변 레스토랑 밀집 구역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내일은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요 같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호텔로 돌아갔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겠습니다. 호텔과 대학 사이 벤치 앞에서 진희에게 인사하자 진희는 흔쾌히 대답했다. 넵, 저는 들어가서 귤 하나 까먹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래서 그야말로 잠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을 때, 갑자기 낯선 사람이 와서 말을 걸었다. 당신 혹시 영국 경찰 번호 알아요? 억양으로 미루어 프랑스 같은 데에서 온 듯했고, 키가 매우 큰 백인 여성이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그 여자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남편과 어린애 둘이 있었다. 음? 몰라요. 그럼 혹시… 음… 여자는 내 옆 벤치 쪽으로 연신 고개를 돌리며 머뭇머뭇 말했다. 미안하지만 알아듣기 어려워 계속 물었고, 더더욱 미안하게도 결국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맥락을 추정할 수는 있었다. 옆 벤치에 (자세와 두꺼운 옷에 가려져 제대로 알 수 없으나) 남성으로 추정되는 취객이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다. 필요한 도움을 내가 줄 수 없는 건 안타까웠지만 내 생각에 날씨는 동사 위험성을 걱정해야 할 만큼 춥지 않았고, 모르긴 하지만 그 취객이 정신 또렷한 여행객 가족보다 두 배는 더 안전할 것이었다. 적어도 여기가 그가 사는 지역인 이상.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를 귀찮게 하는 낯선 여자를 취객이 공격할 여지도 있지 않나? 나는 오히려 그게 불안했다. 여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때가 아니면 취객에게 다가가 정신을 차리라고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연달아 두 대 피우면서 휴대폰으로 트위터를 봤다. 여차하면 처음에 여자가 요청한 대로 경찰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유선상으로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은 대면 대화에서 영어를 하는 것보다 서너 배 더 부담스러웠지만, 적어도 여자보다는 내가 전화를 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착잡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담배를 다 피우고 다시 보니 여자는 없었다. 프랑스인들로 추정되는 여행객 가족도 옆 벤치에 누워있던 취객도 없었다. 내가 담배 두 대 피우는 데 드는 시간이래야 겨우 십 분 남짓인데. 별일은 아니지만 이상한 일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참고로, 영국의 신고 번호는 999와 101이라고 한다. 999는 응급상황을 위한 번호, 101은 비응급상황이지만 신고는 필요한 경우를 위한 번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