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기 쓰니까 재미있지 않아? 지난 글을 본 유리가 그렇게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서 생각한 건데, 순수하게 재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 경우(요즘은 나같경이라는 줄임말을 쓰던데) 아주 자세한 일기를 쓰고 나면 재산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두 가지 차원에서 그러한데, 1) 기억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기록으로 환전한다는 차원에서 그러하고 2) 활자생산노동 종사자에게는 글이 길어져서 손해인 경우가 별로 없다는 차원에서 또 그러하다.
그런데 기억을 기록으로 바꾸는 것은, 이를테면 수증기처럼 부피가 크고 모양이 없는, 그러나 어떤 뚜렷한 성질을 가진 무언가를 분명한 의도에 따라 성형된 용기에 담아 가두는 일 같기도 하다, 한번 기억을 기록으로 환전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기억이 기록을 참조하며 그것의 테두리 안으로 쪼그라들게 된다. 그건 조금은 아쉬운 일이다, 단단하지 못한 대신 방대한 것이 기억의 물성… 이라면 물성일 테니까. 한편 어이가 없을 만큼 균일하지 못한 소비기한… 도 기억이라는 사물의 특성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아주 자세한 일기를 써야만 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늘 이렇다. 달리 말하면 결국은 내가 욕심이 아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억-무형의 자산으로도, 기록-아무도 원고료를 주지 않는 종류의 글로도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아하는(이런 종류의 탐욕은 이 욕망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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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 먹은 것: 전날 산 요거트, 오뚜기 포켓 누룽지, 오뚜기 동결건조 북엇국
전편에서 언급했던 여행짐-꼬박 두달 가까이 쌌다 풀었다 했다는-에 대체 무엇무엇을 챙겼는지 일부 소개할 때가 된 것 같다. 비상식량으로 포켓 누룽지 스무 봉 정도와 동결건조 미역국과 북엇국 각각 네 개, 플라스틱 트레이가 없는 도시락 김, 비비고 볶음김치, 사조 불닭참치 두 봉을 챙겼다. 포장 풀어서 지퍼백에 챙길 생각으로 인스턴트 컵떡볶이도 두어 개 샀는데 이건 마지막까지 챙길까 말까 고민하다 제외했다.
런던에서의 공식적인 첫 끼니(이런 것에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다)라서 뭔가 그럴싸한 걸 먹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앞으로의 여정에서 주방이 있는 숙소에 묵을 일이 별로 없을 테니 직접 뭔가 해 먹는 것도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익히 들어온 영국 요리의 악명도 이 결정에 힘을 보탰다. 출발 전에 빠니보틀 등의 여행 유튜브에서 영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식사를 주제 삼은 콘텐츠를 몇 건 찾아 보았는데…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식사에 칠팔십 파운드(십만원이 왔다갔다)씩 지출하는 건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이어서 조금 유난스럽다 싶을 만큼 열심히 비상식량을 챙겼다.
지나고 나서 여행 중의 식생활을 재평가해보면, 내가 좀 지나치게 겁을 먹었던 것 같긴 하다. 영국에도 맛있는 것은 꽤 있었고 (그런데 그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맛이 아니었다)(나는 극단적으로 밥 인간이다) 좀 쓰라린 식사(가격적으로든 질적으로든)를 하게 된다 해도 그 역시 여행지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인데 그걸 무리해서 피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전날 M&S Food에서 내가 산 요거트는 쥐좆만한 주제에 1파운드가 좀 넘는 가격이었고 (당시 환율로 이천원 가량) 거기서 파는, 편의점 삼각김밥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튜나 오니기리는 대충 한 칠천원쯤 했다. 만약 그때 밥의 유혹을 못이겨 그 튜나 오니기리를 사 먹었다면 그것은 임종의 순간에도 떠올리며 이를 북북 갈게 만들 통한의 식사가 되었을 것이다… 다음 북투어 때도 포켓 누룽지와 동결건조 국, 김치볶음은 쟁여갈 생각이다. 분량은 이번에 챙겨간 것의 절반 정도면 충분할 것 같지만.
아무튼 포켓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겠다는 게 그날 아침의 정식 밀-플랜이었으므로, 상쾌하고 기꺼운 마음(여행 둘째날의 의욕과 에너지 100% 상태!)으로 물을 끓이려고 숙소 전기포트 뚜껑을 딱 열었다가 바로 꽝 닫았다. 주전자 내벽에 정체불명의 작고 하얀 결정이 온통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없던 환공포증이 바로 생길 만큼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내가 잘못 봤을 수도 있으니까… 하며 슬쩍 다시 열어봤는데 처음에 잘 본 거였다. 두 번 보니 조금 전처럼 징그럽진 않았고 아 이게 아마 석회수… 를 끓이면 생기는 문젠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생각. 석회수. 맞아 유럽은 석회수가 나온다지… 어제 별 생각 없이 생수 샀는데 잘 산 거였네. 그 생각을 하고 보니 한숨이 팍 나왔다… 여행짐에 굳이 끼워 온 접이식 전기 포트를 꺼내야 하는 게 귀찮아서. 하지만, 그렇다, 다행히 내게는 ‘이 몸 전용’ 실리콘 접이식 전기 포트가 있었다. 그걸 부지런히 써 먹을 생각에 일회용 설거지 물티슈까지 챙긴 참이었다…
누룽지만 먹으면 심심하니까 볶음김치도 뜯고 김도 하나 뜯었다. 포켓 누룽지는 매일 한 끼씩 먹어도 충분하거나 조금 남을 만큼 챙겼지만 나머지 아이템은 품목별로 열 개 내외여서 아끼려고 했는데… 첫 식사부터 이렇게 플렉스해버려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홈플러스에서 산 번들 상품 하나씩 뜯어 놓고 플렉스 이지랄…) 이 식사를 하면서는 휴대폰을 셀카모드로 세워두고 동영상도 찍었다. 모처럼의 유럽 여행(일하러 왔지만)이니까 나도… 브이로그라는 것을… 찍어볼까 했던 건데… 공개할 생각은 없지만 다 찍고 다시 보니까 나름 웃겼다. 표정을 보면 하염없이 처량하고 재미없어 보이는데 카메라를 뚫어져라 보며 끈질긴 저작운동을 하고 있어서 인간의 몸에 염소의 영혼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침 먹은 게 오전 10시쯤이었나? 이후로는 쭉 일했다. 비행기 안에서 쓰려고 했던 추천사 작업. 1930년대에 일본인 여성이 대만을 여행하는 내용의 소설을 읽었는데, 주인공이 대식가이자 미식가여서 대만 전통음식이 서사의 들보 역할을 하는지라, 다양한 먹거리가 맛깔스럽게 묘사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동양판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고 할까. 무척… 뭐랄까… 고역이었다. 아침식사 뒷정리하고 대략 오후 네 시까지 쭐쭐 굶으면서 이런 소설을 읽고 추천사를 쓰느라. 이십 그램짜리 포켓 누룽지(뜨거운 물을 부어 양을 좀 불리긴 했어도) 하나에 (앞서 언급했듯) 쥐좆만한 요거트 한 통 먹고서 전격 대만 전통요리 열두 마당 차력쇼 읽기… 몸과 정신이 네 갈래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간접경험으로 허구의 포만감을 느끼는 동시에, 실제로는 존나 말도 안 나오게 배가 고픔+교양있고 말맛 좋고 감각적인 소설을 읽어서 기분이 좋은 동시에, 고국에서 비행기로 열네 시간 걸리는 도시에 와서 집에서랑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 기분이 몹시 어두움.
급한 대로 뮤지컬 예매를 했다. 작업 도중 투데이틱스(공연예매 어플)를 켜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보고 싶은 작품을 상연하는 곳이 있는지 잠깐 살펴본 다음 <마틸다>를 선택했다. 알고 보니 런던 차이나 타운은 웨스트 엔드의 일부? 라고 할까, 한국으로 치면 대학로 4번출구 쪽이 차이나 타운인 격이라고 할까… 대부분의 극장은 내가 묵는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일곱시 반 공연을 예매하고, 나가서 저녁을 먹을 요량으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뮤지컬 예매를 한 이유가 바로 그 효과를 노린 거였다, 돈을 써서라도 나갈 핑계를 만들어야 일을 더 열심히 할 동기부여가 될 거라는 생각… 오후 네 시쯤 송고하고 기지개 쭉 켜고, 이틀간 입었던 속옷들과 양말 등을 모아서 세탁기에 넣어 두고 씻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그날 내가 대체 시간을 어떻게 쓴 건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외출은 여섯시가 되어서야 했다. 이상하다, 화장을 한 것도 아니고 크게 딴짓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묵살하고 숙소 아래에 있는 로데오 도넛에서 비건 글레이즈드 도넛을 사 먹었다. 슈가코트 층이 굉장히 두꺼웠고, 코팅에 약간 산미가 있었으며, 글레이즈드 도넛이 대체로 그렇듯 도우는 폭신한 편이었다. 값은 한 5파운드 정도였던가? 도넛 크기가 거의 내 얼굴만했기 때문에 그렇게 비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참고로 전날 식료품점에서 본 튜나 오니기리는 한국 편의점 삼각김밥보다 크지 않았다)
먹으면서 걷다 보니 팰리스 시어터가 나왔다.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를 상연중인 극장. 여담이지만, 귀국한 후에 나눈 스몰토크에서 내가 영국에서 뮤지컬을 봤다니 혹시 톰 펠튼이 출연한 해리 포터 연극을 본 게 아닌지를 누군가 물은 적 있는데 (정확히 누구와 나눈 대화인지는 생각이 잘 안 난다) 내가 런던에 체류하던 시기에 마침 톰 펠튼이 해당 타이틀에서 드레이코 말포이로 복귀한 건 맞지만 톰 펠튼이 출연한 건 웨스트엔드판이 아니라 브로드웨이판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마틸다>는 캠브리지 시어터의 프로그램. 샤프츠버리 애비뉴를 따라 좀더 걸어올라가야 했다.
커다란 글레이즈드 도넛을 먹었기 때문에 극장에 도착해서는 손부터 씻었다. 그러느라 일단 입장권 큐알 체크를 하고 극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아차 기념으로 실물 티켓을 받아두고 싶었지, 하는 생각에 티켓 부스로 돌아나가서 물어보니 어플로 예매를 하고 이미 큐알을 찍은 상태라 종이 티켓은 줄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지. 다시 들어가서 기념품점을 둘러봤다. 사실 ‘둘러보다’라는 동사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바 형태의 매대가 가게의 전부였으니까. 말하자면 티켓 부스처럼. 매장 위에 칠판 모양 메뉴판 같은 것이 있었고, 가게 상품 및 가격은 전부 그 칠판 위에 적혀 있었다-즉 취급 품목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은 가게였다. 제법 길고 심각한 고민 끝에 티셔츠 한 벌을 샀다. 의도치 않게 저녁을 거르게 됐으니까, 그만큼은 돈이 굳었으니까, 또 언제 <마틸다>를 다시 보러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내가 산 티셔츠에는 <마틸다>의 명대사 “Sometimes you have to be a little bit naughty(가끔은 말썽을 조금 일으킬 필요도 있어)”가 새겨져 있다. 우연찮게도 이걸 쓰고 있는 지금 그 옷을 입고 있다. 어쩌면 마침 이 옷을 입었기에 나도 모르게 동기부여가 되어서 이걸 쓸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북투어 후기 1편을 올리고 며칠은 또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으니 억측이랄 순 없겠지.
극장 입구에 ‘Today’s Cast’인가 하는 정보가 적혀 있었는데, Lexie?라는 아이가 그날 공연을 마지막으로 <마틸다> 팀을 떠나게 된다는 귀띔도 적혀 있었다. 프로그램 북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Lexie가 어떤 역할을 맡은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마치 정이 듬뿍 든 동급생이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여서 조금 마음이 찡했다.
<마틸다>가 과연 수준이 높은 공연이었는지? 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울면서 봤다. 마라 윌슨이 나오는 90년대판 영화도 봤고 비교적 최근에 나온 넷플릭스 뮤지컬 영화도 봤고, 토니상 특별공연 마틸다 메들리도 무슨 연례 행사 치르듯 주기적으로 찾아서 보는데 매번 울게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Revolting Children>이지만, 당연히… <When I Grow Up>부터 울었다.
기본적으로 <마틸다>는 로알드 달 특유의 허풍스럽고 과장된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다. 지능이 높다 못해 뇌력;이 너무 발달한 나머지 염동력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주인공, 똑똑하고 용감한 마틸다도 그렇고 명색이 초등학교 교장씩이나 되어서는 아이들을 서슴없이 ‘벌레worm’라고 부르고 귀를 잡아서 던져버리지를 않나 초등학교 1학년을 상대로 식고문;까지 자행하는 트런치불도 그렇다. 이렇듯 거의 전래동화적인 과장이 뮤지컬이라는 형식에 이식되면서는 한층 더 강화되어 <마틸다(더 뮤지컬)>에서 트런치불 캐릭터는 매번 남자 배우가-그것도 남자 성인 평균보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험상궂은 배우가 연기한다. 원작 도서에서 묘사된, 국제대회 출전 경험까지 갖춘 엘리트 투포환 선수 출신의 건장한 신체를 연출하기 위한 선택일 터.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벌레와 다르지 않게 보는 성인은 현실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용감한 어린 아이도 현실에 엄연히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알드 달이 쓴 이야기는 복잡한 감상을 남기게 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고 싶지만, [이런] 사람은 정말로 있다… 이 감상의 연장에서 마틸다의 담임 선생님인 미스 허니가 “어른이 되면 나를 괴롭히는 힘센 괴물에게 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라 노래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눈물을 아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니, 나도 어른이 되어봐서 아는데, 그럴 수 없어… 아니, 나도 어린이였던 적이 있어서 아는데, 그럴 수 있어… 당신 그럴 수 있어… 당신이 무엇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도 상상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아니… 아니… 아니! 펑(눈물 터지는 소리). 이 넘버를 부를 때 배우들은 무대에 설치된 그네를 타고 객석 위로 날아오른다. 그 아름다운 호선이 그야말로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 사이를 운동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정말 펑펑 울었고…
이미 말했듯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역시 브루스의 솔로로 시작되는 <Revolting Children>인데 브루스 역할을 맡은 어린이 배우가 동양인이었다. 참고로 브루스는 트런치불의 아동학대가 절정에 이르는 초콜릿 케이크 식고문 장면의 희생자, 한마디로 ‘뚱보 소년’ 캐릭터다. 브루스 뿐 아니라 라벤더랑 피그테일 머리를 하고 다니는 캐릭터(이름이 생각 안나네 미안해)도 동양인이었다. 그 아이들 중 한국계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지만, 무려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이런 빅 타이틀에서(물론 아역이 중심이 되는 극이긴 하지만) 동양인 어린이들이 이렇게 활약하고 있는데, 걔네가 나랑 국적?이나 뿌리?가 꼭 같아야만 감동일까? 그저 서양인들에게는그 애들이 나와 닮아 보일 거라는 사실 자체에 무척… 고양되는 느낌이 있었다. Go, Team Asian! … 같은 느낌? 워킹 홀리데이 때도 자주 느꼈는데, 서구 문화가 강한 환경에 노출되면 나랑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한패가 된 것 같을 때가 있다(어차피 저들도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우리를 다 한패 취급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아동 중심의 극이고 어린이 관객이 많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선지 이 공연의 관람은 단순 관극보다 ‘응원’의 감각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방금 말했듯 동양인 캐스트가 많아서 내게 유독 그랬을지도 모른다) 딱히 아는 어린이가 출연하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When I Grow Up> 리프레이즈 장면에서 무대 연출로 뿌린 꽃종이를 한움큼 주워서 나왔다. 기념삼아 지갑에 넣어둘 생각으로. 진짜로 넣어놨더니 (이게 뭐 실천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니니까…) 카드를 꺼낼 때마다 꽃종이가 한두 장씩 딸려나올 때가 있는데, 가게에서 꽃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질 때마다 상대가 요청하지 않은 마술을 선보인 기분이 든다. 쩔쩔 매며 주워서 다시 지갑에 넣는다. 조금 난처하지만 내가 그때 거기서 <마틸다>를 봤지… 하고 속으로 웃음 짓게도 된다. 큰맘 먹고 맨 앞줄 티켓을 사서 꽤 큰 지출을 했지만 이후로 내내 느낀 행복감을 생각하면 가성비가 엄청난 셈이다. (참고로 그날 나는 공연장 입장도 1번으로 했다! 별걸 다 자랑하네 싶지만 아무튼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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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고 나올 때는 어쩐지 어마어마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혼자여서 그랬겠지, 라고 퉁치기에는 좀더 섬세하고 맥락이 많은 감정같은데… 어떤 완결된 세계를 등 뒤에 남겨두고 나만 떠나온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게임 엔딩을 보고 난 후의 기분. 약 두 시간 동안의 고향을 떠나는 기분. 그게 영화여도, 콘서트여도, 친밀한 일행이 있었어도 그럴 때가 있다. 긴 한숨을 뽑아내게 만드는 감정. 좋은 경험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좌우간에 약간은 허한 상태였기에… 늦었지만(오후 10시경)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숙소 앞 M&S Food에 들렀다. 전자렌지에 데우면 쌀밥이 된다는 70펜스짜리(대략 한화 1천원) 키트가 있길래 일단 그걸 집어들고 냉장새우도 하나, 요거트도 또 하나 샀다. 쥐좆만하니 어쩌니 욕을욕을 했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게 먹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서 밥 키트를 뜯고 새우를 씻고 간단 주먹밥 가루(오뚜기 밥친구? 였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를 뿌려서 함께 볶았다. 보기에는 그럴싸한 볶음밥이 되었지만 그리 맛있지 않았다. 숙소 후라이팬은 코팅이 다 벗겨져 있었고 찬장에 있던 올리브유는 유통기한이 지나서 쓰기가 망설여졌고 소금… 소금도 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각진 봉투 안에 들어있는 하얀 가루가 정말 식용 소금이 맞는지 알 수 없어 쓰지 않았다. 짧은 영어실력에 그게 소금인지 나트륨이 들어간 세제 같은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대충 Sodium? 그런 단어들이 크게 적혀 있었는데 적어도 천연소금이 아니라 화학적 합성으로 만든 소금인 듯한 뉘앙스) 내가 직접 마련한 식재료들만 사용했더니 (후라이팬은 대안이 없어서 그냥 깨끗이 씻어서 사용했지만) 새우는 비렸고(식감은 괜찮았다)(변명은 아니다) 주먹밥 가루는 아무 효과도 내지 못했으며 밥은 가히 내가 평생 먹어본 밥 중에서 최악. 플라스틱으로 가짜 쌀을 만들어서 밥을 지어 먹어도 이보다는 나으리라 싶은 향과 식감이었다. 한없이 어두운 마음으로 급히 물을 끓여 동결건조 미역국을 하나 풀었는데 그게 눈물이 쏙 빠지게 맛있었다. 한국인이 [맛있다]고 느끼는 맛의 스펙트럼 중에서 마늘의 뉘앙스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최악이라고 평한 엉터리 새우볶음밥조차도 미역국을 머금은 입에 넣으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맛으로 착각되었기 때문이다.
외출 전에 돌려두었던 세탁-건조 루틴은 건조가 좀 불완전하게 되어 있어서 건조만 다시 돌렸다. 스포일러 주의: 다음날 아침에도 빨래는 완전히 마르지 않은 채였다. 그럼 이제 이 숙소의 장점은 대체 뭐지? 주방이 있어서 좋아했는데 식기류도 조미료도 관리 엉망, 기대는 안 했지만 세탁 건조기가 있길래 쾌재를 부르며 써 봤더니 빨래를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에 협소하다 못해 미세한 계단… 내가 어리석어 잘못된 선택들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런던이 서울보다 더한 차씹도라서 뭘 골라도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안할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