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투스

로트네스트 섬의 적법한 지배자이며 모든 쿼카들을 통솔하는 단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 햄스투스

철원 사람?

백마고지역

헤아려보니 올해는 내가 철원 밖에서 산 지 만으로 18년이 되는 해다. 철원에서 딱 18년 살았으니까 이제 절반은 철원 사람 아니라고 해도 되겠다. 그런데 ‘어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체류 시간에 비례해 딱딱 계산되는 것인가, 그럴 리 없겠지. 한참 전부터 나는 내가 철원과 아주 상관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러다 또 가끔은 어림없이 여전한 철원 사람임을 깨닫기도 했다. 지금 고향 아닌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게 무슨 말인지를 알아볼 것이다. 

원래 이 글의 첫 문장은 ‘수도권 전철 1호선 종착역인 소요산역에서 기차를 타면 대한민국 최북단 철도 종단점 백마고지역에 갈 수 있다’가 될 예정이었다. 백일장에 나가려고 기차에 타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구상한 문장이다. 틈만 나면 고향을 벗어날 기회와 방법을 궁리하던 고등학생이 이제는 향수의 맛을 제법 아는 어른이 되어 그때 그 노선을 거꾸로 타고 돌아가 보려 하니, 이 여행에 독자님들도 동행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여쭙는 낭만적인 도입부를 상상했는데,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백마고지역의 운영이 중단된 지 2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덧붙여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종착역은 이제 소요산역이 아니라 연천역이다.)

바로 이런 순간마다 내가 더 이상 철원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고향은 도무지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려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야속해할 수도 없다, 그게 고향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살아있으니까 계속 바뀌는 거라 생각하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좀더 찾아보니 백마고지역에 기존 통근열차 대신 무궁화호가 다니게 될 예정이며 그 시기는 마침 2025년 8월, 올 늦여름부터라고 하는데, 이 소식이 기쁜 걸 보면 역시 내가 아직은 철원 사람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는 기존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글을 전개해 갈 지식이 없으므로 이 이야기는 철원 여행과 시간 여행의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 기억 속의 철원이 마치 모두 같은 시간대의 모습인 것처럼 편의적으로 재구성되어 묘사될 거라는 뜻이다. 

그러자면 애초의 계획대로 소요산역에서 통근열차를 타고 백마고지역에 가야 한다. 백마고지역에서 출발하는 39-3 버스는 커다란 물음표 또는 낚시 바늘 같은 모양을 그리며 철원읍을 관통해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동송읍으로 달려간다. 내가 철원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모두 이 구부러진 선에 달라붙어 있다. 애초에 길 바깥은 90퍼센트 이상이 논이기 때문에 기억을 만들 수 있는 장소가 한정되어 있다고 할까…… 

논과 군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던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의 원작소설 <시모츠마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여기를 봐도 논, 저기를 봐도 논,  천지사방 논논논논.” 대도시 오사카에서 깡촌 시모츠마로 이사 온 소녀가 순도 높은 농촌 풍경에 질려하는 장면이다. 고등학생 시절 이 소설을 읽은 나는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었다. 책의 제목을 바꾸어 <철원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할 묘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원은 강원도에서 거의 유일한 평야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군민 대부분이 영농업 종사자이며 주된 작물은 벼, 오대미를 생산한다. 

따라서 백마고지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처음 타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논이 정말 많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 대부분의 농지는 민통선, 즉 민간인 통제구역 이북에 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자기 논에 드나들 때 군부대에 출입을 보고해야 하며, 정해진 시간 동안만 그 지역에 체류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민통선 내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군 검문소를 통과하며 신분증을 맡기고 ‘영농증’이라는 명칭의 출입허가증을 받아야 했다. 어릴 때 나는 한 번도 안 그래본 적이 없어서, 논에 갈 때는 으레 군인이 검사를 하는 건 줄 알았다. 

요즘도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집이 농사를 그만둔 지도 거의 10년 가까이 된지라. 가장 최근에 철원에 갔을 때는 내가 원래 검문소라고 기억하던 곳들이 텅텅 비어 있어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버스가 출발하는 백마고지역, 그러니까 대마리에서 관전리까지의 십여 분 거리에 검문소는 서너 개가 있었다. 애초에 대마리라는 마을도, 마을 전체가 민통선 이북에 있는 재건촌이었다. 재건촌이란? 식량 생산과 안보를 목적으로, 국가 주도하에 군사분계선 인접지역에 조성한 전략촌. 아, 혹시 그래서였나? 비교적 남쪽에 있는 우리 마을보다 대마리에 먼저 인터넷이 개통된 건. 나는 인터넷 회선이라는 게 개화전선마냥 남에서 북으로 올라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내 기억으론 어째 내가 살던 월하리보다 대마리의 인터넷 개통이 빨랐다. 어릴 땐 잘 몰랐지만 전략촌이라 그런 거라면 뒤늦게나마 납득할 만한 것 같다, 열한두살 무렵엔 그게 그렇게도 분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으나…… 

하여간 작전이니 통제니 검문이니 하는 말들을 실컷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철원 군민의 생활 문화에서는 군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철원 특산물은 오대미가 아니라 육군 병장이라 할 정도다. 농번기가 되면 군 장병들이 대민지원을 나와 상당한 노동력을 보태니 특산물 1호와 2호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버스를 타고 대마리에서부터 동송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갈 때 보이는 바깥 풍경이 논 아니면 지뢰밭이라는 사실 또한 철원의 양대 특산물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지뢰밭? 설마 진짜 지뢰라고? 똑바로 들으신 게 맞다. 차창 밖으로 이어지는 논 풍경이 끊어지고 좁은 도로를 감싼 가드레일 너머 빽빽한 숲 풍경 갑자기 나타났다면, 그게 바로 지뢰밭이다. 잘 보면 숲과 가드레일 사이 철조망이 있다. 좀더 예전에는 철조망에다 ‘지 뢰’라고 적힌 역삼각형 빨간 표지를 달아두기도 했는데, 도로 주변 지뢰제거 작업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그 표지들도 대부분 떼어버린 듯하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어린 시절의 모호한 기억이 남긴 미스터리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학교 뒷동산에서 마주친 젊은 군인에 대한 것이다. 인근 지역 아이들이 다 그렇듯 나도 군인이라면 넌더리가 날 만큼 많이 봤지만 학교에서까지 보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쪽이 너희같은 애들이 왜 이런 델 돌아다니냐고 물어와 왠지 기분이 좀 상했다. 

여기는 우리 학교니까요. 

우리의 대꾸에 그는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이런 데에 학교가 있다고……?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한 거겠지. 우리 학교는 분교였고 교실 세 칸이 전부인 단층 건물이 야트막한 언덕 중턱에 숨듯이 달라붙은 꼴이었지만, 그래도 우리한텐 학교가 학교지 다른 게 아니었다. 그 뒤의 대화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 젊은이가 어린 우리들을 적당히 쫓아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대체 왜 거기 있었던 걸까? 모의 작전 등을 수행하는 병사였을까? 탈영병이었나? 국군의 옷을 입은 간첩? 혹시 귀신은 아니었을까? 정체가 무엇이든 아마도 그는 서울내기였을 거라 짐작해본다. 

학교는 그로부터 몇 년 후에 폐교되었다.

노동당사

그럼 철원엔 그거 말고 대체 뭐가 있어요?라는 질문이 나올 때가 된 것 같다. 천지사방 논논논논 나머지는 군사시설. 물론 철원에는 그것들 말고도 볼 게 없지 않다. 하지만 나머지 보고 즐길 거리들도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논과 군에 연결지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언급해두고 싶다. 토지 대부분이 농지라는 것은 물과 공기가 맑다는 의미, 한반도 중앙 군사요충지라는 것은 아무래도 개발에 제한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삼팔선이 그어지기 전까지는 철원이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빠질 것 없는 도시였다는 전설이 있다. 용산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철도에서 가장 중요한 역 중 하나가 철원역이었다 하니 당시의 위상을 짐작해 볼만하다. 참고로 광복 직전 철원 인구가 3만 정도였다고 하는데 2020년대 현재 인구는 4만 정도다. 광복 직후 조선인 인구는 약 2천 500만, 오늘날 대한민국 인구는 그 두 배 정도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인구가 줄어든 셈이다. 

그럼 대충 생각해도 그 시절 번영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야 할 것 같지만, 지역문화 스토리텔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는 문화유적지를 얼마든지 조성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그것들은 모두 포화에 녹아 없어졌다. 국토 정중앙 군사요충지의 의의는 21세기인 지금보다 1950년대에 더 뚜렷했을 테니까. 대마리 주변의 작은 산들은 모두 능선이 둥글고 부드러우며 고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짐작하셨겠지만 백마고지역의 역명은 가장 유명한 고지인 백마고지에서 따온 것이고, 백마고지 꼭대기에서 보이는 무덤처럼 둥근 고지의 이름은 아이스크림 고지다. 그곳은 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하나였고 주인이 매일 바뀌는 땅이었으며 폭격에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처럼 보여 그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철원의 주된 관광 상품은 원래 이들 고지가 포함된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와 노동당사를 돌아보는 코스로 구성된, 이른바 ‘안보관광’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여기에 제2땅굴까지 방문하는 게 표준. ROTC로 군 생활을 시작한 남자 후배들이 누나 저 얼마 전에 철원 갔다왔어요 라고 연락해올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응 뭐 대충 백마고지 찍고 노동당사 갔다 고석정 갔니? 하면 어떻게 알았냐며 펄쩍 뛰곤 했다. 왜 모르겠니? 노동당사에서 월하리 우리집까지 차로 대충 5분 거리. 초등학생 시절 어느 6월에는 전교생이 노동당사까지 걸어가 주먹밥을 먹고 돌아온 기억도 있고, 노동당사 앞 사요리에는 우리집 들깨밭이 있어 거들러 다니곤 했다. 말하자면 나에게 노동당사는 거의 이웃집. 제복 입은 까까머리 남자애들 한 무리가 멋모르는 얼굴로 버스에서 우르르 내렸다 우르르 다시 타고 떠나가는 광경은 안 보고도 그릴 수 있었다.

근대 문화 거리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철원 관광 상품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었다는 모양이다. 우선 노동당사 앞에 철원역사문화공원이라는 게 조성되었고 그 옆에는 소이산 모노레일 코스도 개장됐다. 철원역사문화공원은 구 철원 시가지의 여러 정경들을 축소판으로 복원해둔 근대 문화 거리를 갖추고 있어 근사한 포토 스팟이 여럿. 당시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도록 우체국이나 극장같은 시설도 꽤 그럴싸하게 지어놨다. 

이런 게 생겼다는 소식을 듣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나도 가 봤다. 철원이랑 정말 아무 상관도 없고 그냥 서울에서 온 관광객인양 빤빤한 얼굴로. 가 보니까 핸드메이드 소품을 파는 가게도 있고 유기농 블루베리 요거트 같은 걸 파는 카페도 있었다.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오는 심정이 어쩐지 조금 기막혔던 것 같다. 내가 노동당사 앞에서 이런 걸 다 사 먹네. 1998년인가에 노동당사 비공식 매점이던 똘이네 슈퍼에서 크림빵 사 먹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조금 벅찬 느낌이기도 했다. 유기농 블루베리 요거트를 파는 카페가 철원 근대문화 거리의 콘셉트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뭐랄까…… 

이게 되네? 

라는 마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철원에서 그런 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바로 옆 우리 마을 월하리만 해도 2000년대 중반에 마을 유일한 구멍가게가 주인의 노령 때문에 닫힌 이래 20년 가까이 편의점 하나 생기지 않았다. 반경 3km 안에 상업시설이 단 한 곳도 없는, 돈의 사막이라고 할까. 물론 운영기관 측에서야 소규모 민간 사업체를 입점시킬 요량으로 상가동을 조성했겠지만, 유동 인구가 워낙 적어 입점 희망 업체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텅 빈 건물만 허허로이 서서 낡아가고…… 내가 아는 철원에서는 그런 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어서 낯설었고…… 낯설어서 조금 좋았던 것 같지만……

고석정

그러고 보면 도시인들의 입장에서는 철원 같은 곳이 오히려 신선하고 힙하게 보일 만도 하다는 생각을 그 몇 년 전부터 하기는 했다. 철원에서 무려 뮤직 페스티벌, ‘DMZ 피스트레인’이라는 것이 열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고석정과 노동당사를 오가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뮤지션들과 전세계에서 모여든 역시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무대를 펼친다는. 노동당사에서 뮤직 페스티벌이라니, 한 30년 전에 직관한 <우정의 무대> 이후로 거의 처음 아닌가. 그때도 나는 벅찬 마음으로 노동당사 개막 무대를 보려고 철원을 찾았다. 철원군의 어떤 고위공직자가 무대에 올라서 철원의 특산물, 평화와 오대쌀을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외쳤고 이후 김사월이 <멸공의 횃불>을 불렀으며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춤을 췄다. 주최측에서는 DMZ 생태탐방 프로그램 등으로 페스티벌 참가객들에게 철원의 청정자연 관광상품을 제안했고, 비건지향인들을 위한 두부전골 식당 등을 포함한 철원의 가지각색 맛집들이 페스티벌 지도에 수록되었다. 이튿날 고석정 메인무대에서 술탄오브더디스코와 혁오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철원에서 말이다, 철원에서……!

이 모든 변화들에 어리둥절해 하는 동시에, 이게 우리 동네지 하고 남모르게 의기양양해하던 기억이 난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여느 외지인들과 내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고석정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 소풍 때만 되면 가던 곳. 놀이기구 마음껏 타라고 엄마가 목걸이형 동전지갑에 삼만 원을 넣어줬는데, 바이킹 타다 날렸는지 하늘자전거 타다 떨어뜨렸는지 지갑 째로 잃어버려 엄마한테 죽도록 혼나고 또 죽도록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곳. 한 번도 꽉 찬 꼴을 본 적 없는 그곳에 철원군 인구 가까운 인원이 모여 있고 그 앞에서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무대를 선보이고 있으며 참가객 일부는 내가 어릴 때에도 이미 한참 낡아있던 놀이기구를 레트로해서 더 좋다며 줄 서서 타고 있는 상황이 거의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피자겟

이런 것들이 생기기 전에도 철원은 레포츠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안보관광 이야기를 필요 이상으로 길게 해 버렸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역사나 군사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 밖의 관광객들은 주로 래프팅 또는 탐조 활동을 위해 철원을 찾았다. 아주 오래 전 철원에 평야지대를 선사해준 화산활동이 한탄강 주변으로 현무암 주상절리도 조성해주었고, 그래서 이쪽 물길을 따라 즐기는 래프팅이 끝내준다는 모양이다. 주상절리와 래프팅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걸 안 해본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39-3번 버스에 39-3이라는 노선 번호가 붙기 전, 버스 종점이 백마고지역이 아닌 연천군 신탄리역이던 시절부터 그 버스에는 종종 수상스포츠 장비를 든 사람들이 종종 탔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오후에 신탄리를 출발해 동송으로 가는 버스에 탔을 때가 생각난다. 대학생 한 무리가 일명 일진석, 그러니까 버스 맨 뒷자리를 말발굽 모양으로 차지하고 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버스가 종점인 동송에 가까워졌을 때 안 그래도 시끄럽던 그들이 와악 하고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듣자하니 피자겟이라는 이름의 피자가게가 우스워 보인 모양이었다. 피자헛도 아니고 피자겟이래, 아 나 미쳐버리겠네…… 

그게 왜 웃기지? 

말할 것도 없이 피자겟은 내가 좋아하는 가게였다. 당시로선 동송 시내 유일한 피자가게였고 내 친구들이 돌아가며 아르바이트를 한 곳이었다. 이후 십수년간 수없이 많은 피자를 해치워온 입장에서 재평가하더라도 다른 프랜차이즈에 뒤질 것 없이 맛이 좋았다. 동생이랑 나랑 한푼 두푼 모은 돈에 엄마가 몇 천원 보태고 셋이 머리를 모아 어떤 피자를 먹을지 치열한 논의를 거친 다음 한 상에 둘러앉아 나눠먹는 따끈한 행복의 도형, 그걸 알게 해준 가게였다. 그런데 외지에서 온 대학생들은 한마디로 그걸 피자헛이 못된 짝퉁으로 취급하는구나. 

정확히 그 일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철원을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물론 나는 정말로 내 고향이 부끄러웠던 게 아니라 남이 사는 동네를 함부로 웃음거리 삼는 무례한 외지인들이 미웠던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그 안에 정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느냐 하면 아니라 할 자신은 없는 정도로 철원을 부끄러워했다. 그래 이 시골짝, 피자헛 대신 피자겟에서 피자를 사 먹어야 하는 촌구석, 병역 관계로 철원에 머무는 젊은이들이 아니면 이 허접한 상권조차도 가누기 힘든 동네. 

이놈의 집구석! 하고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으로, 그렇게도 나는 철원을 미워했던 것이다.

월하리

비유하자면 요즘의 철원은 나에게 ‘말쑥하게 차려입은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것 같다. 

그렇구나, 잘 빼 입으면 이 양반도 여느 신사들 못잖게 맵시가 나는구나. 그런데 때 빼고 광내고 옷 골라 준 사람이 나는 아니고 우리 어머니도 아닌 것 같은 마음에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생각하면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땐 그렇게 고집이 세서 내 말도 엄마 말도 안 듣더니 누가 이렇게 당신을 바꿔놨냐고 묻고 싶은 심정. 그런데 사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차림의 아버지에게 장난도 걸고 싶고 농담도 하고 싶다.  이미 마음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허튼 말 꺼내기가 쉽지 않지만. 

이게 그리 생뚱맞은 비유는 아닌 것이, 바로 그런 나의 아버지가 철원에 산다. 혼자서 산다. 내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월하리 바로 그 집에 아직도. 

고향 동네 이름인 걸 감안하더라도 마을 이름이 참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월하리, 말 그대로 달 아래 동네. 마을 어귀에 달처럼 크고 둥근 모양의 버스 정류장이 있는 동네. 이 동네에 대해선 그밖에 특별히 말할 게 없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한 해에 한 번 꼴로 철원에 다녀왔다. 매번 명절이 아니었고 특별히 아버지를, 아버지 말고 다른 누구를 만날 것도 아니면서 그랬다. 내 차로 가기도 하고 애인 차로 가기도 하고. 철원에 갈 때마다 매번 들른 곳은 고석정과 노동당사 두 군데 뿐이었는데, 차로 삼사십 분쯤 걸리는 두 장소를 순회하려면 반드시 월하리 앞을 지나게 된다. 북으로는 노동당사, 남으로는 도피안사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 마을 앞으로 뻗은 도로를 일부러 천천히 달리면서 저기 마을회관 앞 언덕 위에 있는 빨간 벽돌 집 보이냐고 동행자에게 묻곤 했다. 

저기가 우리집이야. 

조수석 또는 운전석에 앉은 동행인은 으응? 좀 빨리 말하지, 돌아갈까? 매번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기가 내가 살면서 제일 많이 운 장소야, 까닭도 없이 울컥 솟는 울음을 참으면서 몇 번이나 속으로 뇌었다. 그 집을 떠난 지 18년이 되었어도 이 기록은 어째 갱신되지를 않는다. 

2025년 여름 보보담 통권 57호(철원 특집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