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투스

로트네스트 섬의 적법한 지배자이며 모든 쿼카들을 통솔하는 단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 햄스투스

모험 일지 1

발레 못 갔다. 11시 수업인데 11시 40분에 일어났다. 알람을 9시 30분, 10시, 10시 30분으로 맞췄는데 세 개 다 못 들었다. 아니 첫번째는 들었던가? 조금 더 자도 된다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알람을 끈 것 같기도 한데, 경험인지 상상인지 모르겠고 둘 중 어느 쪽인지가 중요하지도 않다. 아침 여덟 시가 다 되어 잤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발레 가면 힘들지만 그만큼 뿌듯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꼭 가고 싶었기 때문에, 기분이 아주 처참하다. 새벽에 아 맞다 하며 텀블러 설거지도 해 두고(수업 도중 물을 못 마시면 정말 너무 힘들다) 오늘 입을 레오타드도 미리 꺼내뒀는데.

나를 원망하는 나에게 적어도 한 가지는 보상하고 싶어서 (달리 말하면 내가 대책도 쓸모도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그만 하고 싶어서) 그동안 쓰기를 망설이던 북투어 기록을 시작할 마음을… 드디어 먹었다. (또 달리 말하면, 이렇듯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한 일에도 그럴싸한 명분이나 익스큐즈를 요구하는 인간이라는 거다, 성가신.) 체류하는 동안에는 너무 바쁘고 힘이 모자랐고 다녀온 직후에는 마음이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긴 작업이 될 것 같아서 엄두가 나지 않지만,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봄으로 예정된 또다른 해외투어 때까지도 첫 북투어 정리가 끝나있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이참에… 그래. 이참에라는 말 좋다.

이참에 한 번 해치워보자.

그런 마음이 된 거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북투어 성사의 배경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좋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영미 출판계나 해외 북투어에 관심이 있는 한국 작가에게는 필요한 정보일 수도 있다.

2025년 10월에 나의 첫 책 <체공녀 강주룡>의 영문 번역서 <Capitalists Must Starve>(안톤 허 번역)가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현지 출판사인 Tilted Axis(‘기울어진 축’)는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설립한 곳으로, 영미문학 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나 다양한 언어권의 문학 작품을 영어로 소개하는 비전을 품은 비영리 독립출판사다. 지금까지 틸티드에서 소개한 한국 소설에는 <대도시의 사랑법(Love in the Big city)> <저주토끼(Cursed Bunny)> <디디의 우산(Didi’s Umbrella)>등이 있다. 이중 두 작품이 안톤 허의 번역이고, 두 작품 모두 부커상 수상 후보로 호명된 바 있다.

출간작 목록이 많은 정보를 말해줄 것이다. 틸티드가 규모있는 출판사는 아닐지라도 번역문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회사인 것은 분명하다. 영미출판계에서는 틸티드와 같은 경우를 두고 ‘tastemaker’라는 말을 쓴다. 경향을 선도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런 출판사에서 영문판을 낼 기회를 얻은 것도 감사한데, 출판사에서 <Capitalists Must Starve> 출간 일정에 맞춰 방영(訪英)할 의사를 물어왔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작가가) 좋다고 하니 출판사에서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을 요청했고, 나도 틸티드도 썩 풍족한 상황은 아니어서 지원이 승인되지 않으면 북투어 자체가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됐다… 어떻게 잘… 됐다. (이러한 종류의 일은 내 뜻으로 되는 게 아니니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10월 15일 런던 인, 11월 11일 런던 아웃, 공식 일정은 10월 18일부터 28일까지, 나머지는 자유여행. 유럽행은 처음이어서 초청해준 쪽이 항공권 값을 부담해줄 때 (말하자면 이 또한 ‘이참에’) 좀더 누리다 오고 싶었다. 물론 사적인 일정을 수행하는 동안의 숙박비는 내가 냈다… 사후적인 얘기지만 환율이 이 정도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개인 일정을 좀 줄여보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탄 비행기는 10월 15일 12시 20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18시 50분경 히드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실제 비행 시간은 4시간 30분이 아니라 14시간여 소요되었을 거다. 아마도. 이런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었는데 긴장은 별로 하지 않았다. 정말 확실하게 기억나는데, 긴장은 정확히 18일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의 긴장은 거의 병적인 것이어서 기억을 못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공식 일정은 (출국 직전까지 수정되기는 했어도) 거의 9할정도 완성된 상태였는데 내가 직접 짜야 하는 개인 일정은 대략 출국 이틀 전까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가서 뭘 할지는 정하지 못했으면서 여행 가방은 9월 초부터 쌌다. 대략 출국하기 두달 전부터 거실 한가운데에 28인치 캐리어를 세워두고 그걸 열었다 닫았다, 풀어헤쳤다 다시 쌌다 난리를 피웠는데 정작 유럽에서 뭘 할지는 하나도 생각하지 못한 거다. 이 두 정보를 교차시키면 스스로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또 하나 알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비하고 싶어하는 한편 사실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비겁한 사람의 속성을.

그런데 출국 직전까지 장편 연재 원고를 쓰고 있었기에 (정확히 출국 일주일 전 10월 8일에 마지막 에피소드 송고 기록이 있다) 그 또한 뭐… 어쩔 수 없었던 일 같다. 하물며 내게는 아직 착수도 못한 계간지 단편 원고도 있었다.

(꽤 길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아직 여행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군…)

비행기 안에서 남긴 메모를 여기에 옮겨본다. 여행 얘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하기 위한 차원에서 .

승무원에게 메모지를 요청해서 받은 종이에 쓴다. 비행기 안에서 가볍게 쓰려고 챙긴 수첩을 꺼내지 못하고 가방을 선반에 넣어버린 탓이다. 몇 시간 전부터 메모를 좀 하고 싶었는데 바보같이 스도쿠 파우치(연필, 샤프, 지우개, 스도쿠 패드가 들어있음)(스도쿠 패드: 클립보드와 스도쿠 문제지 수십 장으로 구성됨)만 꺼내고 수첩은 꺼내지 않아서 시간을 조금 허비한 것 같다. 출발 후로부터 5시간 33분이 지났다고 한다. 남은 비행시간은 8시간 40분여다.

승무원이 가져다 준 종이는 미색용지 3장과 편지봉투 하나로 된 세트였다. 생각보다 비행기 안에서 뭔가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편지봉투가 함께 있는 것도 쓰임이 다양해 보여서 좋았다. 유사시에는 비행기 안에서 유서를 써야 할 수도 있으니까…

이웃한 자리에는 모자(母子)가 앉아있다. 무척 예의바르고 비행 스킬이 능숙하달까, 장거리 비행에 대응하는 여러가지를 잘 갖춘 듯하다. 아까는 나에게 약과도 줬다. 그런 것 안 주셔도 잘 비켜줄 것이었지만 (내 자리가 복도 쪽 좌석이다) 받고 보니 뭔가 생각이 많아졌다. 실은 내 바로 옆자리 소년(대략12~13세로 추정된다)의 덩치가 매우 커서 불편하다는 생각도 줄곧 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내식을 먹을 때가 그랬다. 아이가 밥을 입에 넣으려고 몸을 앞으로 숙일 때마다 연결된 좌석 전체가 들썩들썩거렸다. 기내식은 소불고기 쌈밥과 닭갈비 중 택1이었는데 이건 한국식 비프 오어 치킨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재미있었다. 나는 닭갈비와 콜라를 골랐다. 옆자리 아이도 똑같은 옵션을 주문했기 때문에 아, 나는 남자 초등학생과 똑같은 입맛을 지니고 있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어떤 초등학생도 닭갈비와 콜라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닭갈비는 짰다. 옆자리 모자 중 어머니 쪽은 미리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저염식 옵션을 신청해두신 모양인데, 나도 나중에는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염식은 10분 정도 먼저 제공되기도 했다.) 닭고기 자체가 훈제 닭고기 같았다. 샐르드는 크루통이 들었길래 손도 대지 않았고 모닝빵과 버터는 남겨 두었다가 영화 보면서 간식으로 먹었다.

계속 시선에 걸리는 승객 한 분이 있는데 (내 자리에서 복도를 끼고 대각선 자리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그냥 보인다) 이 분은 소불고기 쌈밥을 골랐고 이 분이 식사하는 광경을 보니 나도 저걸 먹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쌈채소를 한장한장 정성껏 사용하셨고… 마지막에 바람떡 같은 후식까지 야무지게 잘 드셨다. 머리가 갈색으로 센(한번 염색했던 백발이라는 뜻이다) 할머니이신데 밥과 떡으로 부푼 볼이 뒤에서 보니 아기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이 분은 <맘마미아!2>와 같은 영미권 여성 관객 타겟 영화를 주로 보셨다. 그 앞자리 승객은 <당백호 점추향>을 보다가 <영웅본색>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당백호 점추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왜 이 영화들을 다 알지? 다 안다… 지어낸 게 아니라 진짜 그래서 나도 황당하다. 대단한 영화광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지만 정작 나는 지금 아무 영화도 보고 있지 않다. 처음엔 의욕이 넘쳐서 기내에서 감상 가능한 영화를 전부 체크한 다음에 보고 싶은 영화를 ‘나의 영상’ 리스트에 담았는데 12편까지밖에 담을 수 없어서 거기까지만 했다. 그러고선 <플로우>를 30분, <마제스틱>을 또 30분 봤다. 둘 다 이미 아주 훌륭한 영화라는 감이 왔는데 이 허접한 이어셋 말고 제대로 된 환경, 그러니까 음향 뿐 아니라 화면이나 같이 볼 사람 등의 요소까지 재편된 환경에서 감상하고 싶어졌다. <플로우>는 유리랑 보면 좋겠다. 꼬리를 쏙 닮은 새까만 고양이가 나오고, 호준도 좋아할 것 같다. 골든 리트리버가 나온다. <마제스틱>은 재성 취향일 것 같다. 짐 캐리+매커시즘+포레스트 검프 느낌이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썼기 때문에 슬슬 손이 아프지만 까먹기 전에 이건 적어둬야지. 출발 전에 공항 지하 푸드코트에 갔을 때 문득 엄마와 나의 차이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이라기보다 세대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은데, 이런 것이다. 만약 엄마가 이 푸드코트에 왔다면 그리 먹고 싶은 게 없어도 차선을 골라 주문했을 것이다. 그건 식사 시간에, 이 장소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 반면 나는 그 푸드코트에 일부러 갔다. 남산왕돈까스가 있길래. 먹고 싶은 게 없으면 나는 조금 더 결정을 유보한다. 나도 주어진 시간 안에 식사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더 나은 옵션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또한 그걸 찾아보려는 시도를 좀더 해보는 것 같다. 장단이 있을 것이다 두 방식 각각의.

사실 소설도 쓰려 했고 추천사도 쓰려 했다. 장장 14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동안. 그런데 추천사를 쓸 책은 PDF를 깜빡하고 안 담아왔고, 소설은… 일단 두고 보자. 아직 비행 시간은 8시간 1분이나 남았으니까.

(이때 쓰려던 소설은 그로부터 20일 후 11월 4일에 로마에서 완성되어 송고되었다.)

비행기 안에서의 30여분이 상세하게 기록된 것에 비해 이후의 기억은 비교적 모호하다. 특히 비행기에서 내린 후 수속이 어떻게 되었던가… 같은 것. 여권과 티켓을 주머니에 넣고 손으로 꼭 쥔 채로, 그러니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걸었는데 패스트 트랙으로 나왔다. 대한민국 여권을 비롯 10여개국? 정도는 영국 공항에서 짧은 수속이 가능하다는 모양이다. 모호한 기억에 따르면.

14시간이 넘는 휴연을 만회하려고 흡연구역을 찾아다녔지만 묻는 곳마다 밖으로 나가라는 말만 하고, 가리키는 대로 가보니 택시 승강장(그나마도 옥외가 아니고 필로티 주차장같은 곳이었다)으로 이어지길래 한두 시간만 더 참자, 하고 다시 공항 건물로 돌아갔다. 그런데 유럽에서 한 달 가까이 보내면서 차츰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냥 거기서 피웠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거다. 그냥 밖으로 나가라고 성의없는 손가락질을 보여준 사람들도 아마 그걸 알아서 그랬을 거다. 이탈리아에서 들은 말인데, “이곳 사람들은 하늘이 보이면 무조건 흡연구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런 것을 모르기도 했고 영국 전자담배 정책이 어떤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여름에 갔던 홍콩은 전자담배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우물쭈물 갈팡질팡하다가… 그랬다. 공항으로 돌아가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같이 걷는 방향을 대충 따라 걸으니 엘리자베스 라인을 탈 수 있는 승강장이 나왔다. 큰 무리 없이, 운 좋게도 별 대기 시간도 없이 열차에 탔다. 역을 벗어나면서 내가 히드로 공항에 와 보기 전에 히드로 공항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을 잠깐 생각했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에서. 공항 건물을 이룬 수많은 유리창들을 짤막하게 묘사했던 기억. 가 보지 않은 곳에 쓰고 나서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되는 기적들.

토트넘 코트 로드 역까지 지하철을 탔다. 환승을 했던가? 한번 했던 것 같다. 엄청나게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때 시점으로 내 캐리어는 21킬로그램이 조금 안 되었고 백팩 무게는 7.9킬로그램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는 찾지 못했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에 탔는데 캐리어 바퀴 폭이 에스컬레이터 계단 폭에 아슬아슬하게 맞는다는 걸 이때 알았다. 납작했던 에스컬레이터 계단이 상승하며 내 캐리어 바닥을 밀어올리는 바람에 캐리어와 함께 굴러떨어질 뻔했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쏟아질 뻔하다가 간신히 손잡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캐리어 바퀴가 앞 계단에 바싹 붙게 위치를 조정하면서,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건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한 묶음이다.

출구를 벗어나 베네통 매장 앞에서 (비행시간에 수속시간과 이동 시간을 더하여) 장장 17시간만에 담배를 피웠다. 출구와 베네통 매장 사이 길의 이름은 딘 스트리트였는데 조금 후에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면서 보니 근사해 보이는 펍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그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잘 차려입고 있었다. 대체로 친구나 연인, 가족 같지는 않았고 회사 동료들처럼 보이는 일행들이었다. 역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걸인들. 광인들. 많지는 않았다. 겁이 났기 때문에 캐리어 손잡이에 한 손을 끼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누가 와서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도 겁이 났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연달아 두 대. 머무른 시간은 10분 가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체류가 나에게는 런던이라는 도시의 첫인상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렇게 짧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거기서부터 딘 스트리트를 15분 정도 걸으면 차이나타운. 내 돈 주고 이틀 연박을 예약한 첫 숙소는 차이나타운에 있었다. 주방을 갖춘 아파트먼트 호텔 타입의 숙소. 캐리어를 끌기에 좋은 길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여행객들이(들고있는 가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를 앞질러 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보면서 한참을 끙끙거렸다. 구글 맵에 따르면 나는 길 끝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한번, 거기서 위쪽으로 다시 한 번, 그런 후에 다시 왼쪽으로 한번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직진하는 횡단보도가 없어서 사거리를 감싸는 형태로 길을 건너야 한다는 거였다. 이때까지는 런던 사람들이 얼마나 무단횡단을 많이, 잘 하는지 몰랐다. 아무 짐도 안 든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무단횡단하는 길을 나는 30킬로그램에 가까운 짐을 밀고 끌며 돌아돌아 건넜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그 무거운 걸 끌며 무단횡단을 시도하다 길 한가운데에 갇히는 게 더 위험했을 테니 그러길 잘했다 싶기는 하지만. 호텔 건물 앞에서 그보다 훨씬 큰 문제를 알아차리기도 했다. 지도 어플이 알려주는 대로 착실히 왔는데 호텔 건물이 호텔 건물이 아니었던 거다…

알고보니 내가 예약한 숙소는 호텔보다는 에어비앤비에 가까운 거였다(호텔스닷컴에서 예약했는데도). 일반 주거용 빌딩에 차려놓은 데다 프론트 없이 무인 체크인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약 30분정도 건물 주변을 탑돌이하듯 빙빙 돌다가 (이때까지 내 숙소가 이 건물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호텔에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예약 어플을 열었다가 호텔 측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현관 비밀번호와 출입 방법이 적혀있는 메시지… 진작에 확인해볼걸. 숙박 사기? 라도 당한 게 아닌지 의심하기 전에, 국제 미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다른 호텔을 예약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전에. 그렇지만 여전히 호텔 입구는 호텔 입구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빌라의 공동 출입 현관문 같았고 비밀번호 입력 패널도 숨겨져있다시피 했다) 문을 한참 째려보다가 마지못해 비밀번호를 입력해 보았다.

이게 이 여행기의 첫번째 사진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호텔 입구가 얼마나 안 호텔 입구 같았는지 부연하기 위해 구글 지도에서 캡처해왔다. 로데오 도넛과 푸드 앤 와인… 어쩌구 하는 빨간 간판 사이 회색 문이 호텔 입구다.

오후 9시가 넘어있었고 진입 시도를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나은 상황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방황과 번뇌가 싱겁게도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것이 너무 감사해서 바로 다음의 고난은 비교적 작게 느껴졌다. 다음으로 예비된 고난은 이 숙소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단차가 무척 심한, 높고 가파른 계단이었고 층계참에 두 사람이 동시에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어떻게… 이런 계단이 있는 숙소를… 유럽 여행객들에게 제공할 수가 있지? 이 숙소에 찾아온 사람 중에 28인치 캐리어를 가진 사람이 내가 최초는 아닐 텐데. 기어이 반층 높이에서 캐리어를 한번 굴러떨어뜨린 직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내 방은 2층에 있었다. 그리고 영국 사람들은 우리가 1층이라 부르는 곳을 Ground Floor, 0층으로 친다.

체크인하기까지 심신 양도로 너무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숙소 컨디션 자체는 좋았다. 화가 다 풀릴 만큼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더 화가 날 정도로 나쁠 건 없었다. 묘하게 플라스틱 타는 냄새 같은 것이 배어있기는 했으나(weed 냄새는 아니었던 것 같다, 후일 나는 글래스고에서 그 냄새를 정확하게 맡아보게 된다) 전반적으로 깔끔했고 주방이 있다는 게 특히 좋았다. 주방에는 건조기 일체형 세탁기까지 있었다. 한국형 풀옵션 원룸 주방에 있는 것처럼 싱크대 밑 빌트인 타입으로. 이후의 여정들로 알게 된 것이지만 냉장고, 당연한 것 같은 이 옵션도 알고 보니 유럽에선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거였다.

잠깐 쉬다가 나갔다.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비행기 마지막 기내식이었던 치킨 파니니. 그게 대략 예닐곱 시간 전이었으니 밥을… 먹을 때가 지나긴 한 거였다. 숙소 건너편에 M&S Food라는 식료품점이 있어서 거길 조금 둘러보고 요거트 하나, 물 한 병을 사 왔다.

그러고는 모든 의욕을 잃고 그냥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