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비가 왔고 내가 즐겨 신는 슬리퍼(나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쓰레빠”라고 힘주어 말하기 때문에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쓰레빠라는 말이 주로 쓰일 것이다)(물론 또 나와야 할 경우에)는 빗길 특정 소재에 무척 잘 미끄러지는 특징이 있어 쇼핑몰에서 나오는 길에 호되게 넘어졌다. 넘어지는 광경을 유리가 생생히 보았다. 나로 말하면… 나는 내가 순식간에 넘어졌다고 느꼈다.
어떤 순간에, 예를 들어 넘어지는 순간에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느껴졌다고 하는 경우가 있잖아? 나도 그런 적이 있고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인지 아는데 이번엔 반대로 모든 게 엄청나게 빠르게 느껴졌어. 나는 내가 미끄러진 줄도 몰랐는데 다음 순간 바닥이 눈앞에 있었어. 그런 다음에야 아팠어. 차 안에서 내가 한 말은 이렇다.
나는 네가 넘어지는 걸 옆에서 봤잖아. 내가 그걸 느꼈어. 얘 넘어진다 그것도 엄청 크게 넘어진다 지금 응급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라는 생각이 막 들었어. (내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차 안에서 유리는 이렇게 말했다.
넘어진 다음에 나는 곧장 일어난다. 얼마나 아프든 그러도록 훈육이 되어 있다. 이번에 나는 내가 잠을 잘 때 곧잘 취하는 자세, 그러니까 엎드려 양팔로 머리를 괴고 한쪽 다리는 무릎을 접어 옆구리까지 끌어올린 모양으로 넘어졌고 그런 모양인 김에 바닥을 짚은 양손으로 바닥을 밀며 상체를 일으켰는데 일어나는 순간에야 어깨와 무릎이 아팠고, 그래서 무심코 “차라리 피가 나야 했는데”라는 말을 제일 먼저 했던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피가 나야, 피부에 균열이 일어나야 통증이 빠져나간다는 (쓰고 보니 중세적인 느낌이 드는) 믿음이 있었다. 유리가 괜찮냐 물으며 주워서 건네주는 쇼핑백과 휴대폰을 받아들고 유리 차가 주차된 H31 칸까지 걸어가는 (그 사이에 유리는 “너 그 쓰레빠 버려야겠다!”라고 했다) 동안에 젖지 않은 바닥을 골라 디디면서 나는 끝없이 떠들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인스타에서 러너스 하이에 대한 글을 봤거든. 본문 내용보다 사람들 체험담이 담긴 댓글들이 더 재미있었어. 그 중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어. 10km를 뛰고 나니 어? 앞으로 10km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 다리가 가벼워서 거의 가슴 앞까지 무릎이 쭉쭉 올라온다는 느낌이 들었대. 그런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양 무릎이 동시에 올라오더래. 무릎이 올라온 게 아니라 자기가 넘어진 거였대. 넘어질 때, 내가 넘어진다는 느낌보다는 바닥이 내 눈 앞에 다가온 듯한 느낌이 더 컸기에 바로 이 이야기가 생각났고 유리는 끝까지 들은 후에 다소 착잡한 투로 답했다. 흥미로운 얘기네. 나는 그제야 (넘어진 후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혀 방금 있었던 현상에 대해서 한참을 떠벌거린 후에야) 유리도 몇년 전 넘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자 차라리 피가 나야 했는데 라고 말했던 게 뒤늦게 후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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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일요일이었던가 호준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유리가 타고 뒷좌석에 내가 탄 채로 각각 초코우유 커피우유 딸기우유를 마시면서 삼성동에 가던 때가? 가는 길에 나는 누구를 한참 욕한 후에 동의를 구하듯 그 인간은 대체 왜 그럴까? 하고 물었는데 운전대를 잡은 호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엠지MZ라서 그런가보지.
나: 야, 걔만 엠지냐? 나도 엠지야.
호준: 너는 엠지고, 걔는 엠제트고.
나: 말하는 거 존나 싸가제트 없네.
이때 유리가 웃음을 터뜨렸고 갸우뚱대던 호준도 뒤늦게 웃기 시작했다.
나: 너 솔직히 한번에 못 알아들어서 이제 웃는 거지?
유리: 존나 능제트 딸리네.
이 대화가 발생한 직후 나는 반드시 이걸 일기에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로부터 대략 열흘 가량이 흘렀다) 어떻게 써야 이때의 유쾌함이 효과적으로 기록될지를 고민하며 머릿속으로 이 장면을 가다듬고 가다듬고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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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어제는 아주 나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빴는지를 쓰기보다는 어떻게 어제가 극복되었는지를 쓰고 싶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기분이 상당히 나아졌고 (그전까지 내내 공복이었다) 유리가 괜찮은지 물어오며 저녁 먹고 쇼핑하러 갈는지 물어올 동안에 더는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충동이 솟았다. 망가진 전자담배 기기를 새 것으로 대체하고 아이코스 시연실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울 동안 많은 것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내가 이미 했거나 시도하려던 자해들에 대한 상상이. 전자담배 가게를 떠난 후에는 푸드코트에 들렀고 모던하우스와 다이소에서 각자 필요한 것을 샀다. 우리가 함께 준비하기로 한 일본어 자격증 시험에 관계가 있거나 없는 것들.
그러고서 쇼핑몰을 나서는 길에 나는 쩍 소리를 내며 넘어졌던 것이다. 내가 넘어진 바닥이나 바닥에 직접 부딪친 무릎 둘 중 하나는 분명 갈라지거나 쪼개졌을 것 같은 시원하면서도 불길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