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투스

로트네스트 섬의 적법한 지배자이며 모든 쿼카들을 통솔하는 단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 햄스투스

요즘 날씨 끝내줘

4월에 나온 신간과 관련하여 ‘작가의 방’ 전시 이벤트를 하기로 했다. 애장품 일곱 점을 골라서 갖다주고 왔다. 내가 고른 애장품의 목록은 이렇다: 엉덩이를 쭉 뺀 자세로 하트 모양 오브제를 내밀고 있는 농담곰 인형, 유리가 만들어 준 ‘멋쟁이 토마토’ 키링, 파버 카스텔 연필깎이, 민트색 데스크탑 반가사유상, 홍콩 여행에서 사온 DIY 키트로 만든 당나귀 인형, 빨간색 로모 폴라로이드 카메라, 작년 여름 작가의 방(물론 다른 전시처)에도 냈던 미러볼. 애장품을 받으러 나온 분은 미러볼과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가장 마음에 들어하셨다. 가슴팍에 ‘사랑받고 자란 티’라고 적혀 있는 검정색 XXL 티셔츠. 집에 돌아와 자리에 앉자 애장품에 대한 코멘트도 몇 마디 들려달라는 메시지가 왔다. 이렇게 써서 보냈다.

  • 미러볼: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 자세히 보면 이가 약간 빠져 있습니다만 여전히 영롱합니다.
  • 농담곰: 집에 농담곰zone이 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 폴라로이드 카메라: 카메라 욕심이 조금 있습니다. 사진은 잘 찍지 않고 소장에 의의를 둡니다.
  • 토마토 마스코트 키링: 이유리 작가님이 직접 만들어 준 것입니다. 어느날 “서련 멋쟁이 토마토는 입이 있어? 없어?”라고 하길래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인형에 입을 달아주어야 할지 말지를 물은 거였어요.
  • 당나귀 인형: 여행지에서 사온 DIY 인형 키트로 만들었습니다. 약간 잘못 만들어서 자립이 불가능합니다. 이 당나귀를 주인공 삼아 쓴 <이 당나귀>라는 시가 있어요.
  •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자세히 보면 깨진 구석이 몇 군데 있습니다. 사실 작업방 말고 침실에 두는 오브제예요. 마음에 들어서 핑크색도 샀습니다.
  • 연필깎이: 일반연필보다는 색연필을 깎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기계장치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카메라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큰 할 일을 끝냈다 생각하며 스팀에서 뱀파이어 서바이버스를 켰다. 워낙 많이 한 게임이라서 금세 질릴 거라 생각했지만 새로 생긴 어드벤처 모드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몇 판 하는 사이에 유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홍대에 있는 문구 편집숍에 가고 싶다고. 그럼 같이 갈까. 찬물샤워를 한 후에 유리를 만나 목표했던 가게까지 걸어갔다. 쇼핑이 끝나고 유리에게 얼마 정도 썼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만삼천원. 내 말에 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 대체 뭘 산 거야. 저녁 먹으러 가서 서련이 산 거 구경해야겠다. 나도 웃겼다. 친구 따라 강남 갔다가 친구보다 더 흥을 내 버린 셈. 나중에 보니 노트를 고정할 때 쓰는 클립 두 개에 가격표가 따로 안 달려 있었는데 아마도 그게 꽤 고가였으리라고 유리가 일러주었다.

출발할 때는 여섯시 반? 사십오분? 그쯤이었을 텐데 문구 편집숍을 둘러보고 가는 길에 발견한 빈티지 옷가게까지 들렀더니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 동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원래는 우리집 근처 게장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 했는데 가게 앞에 나와 있던 점원이 조금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홉시 반에 운영이 끝난다는 말을 했다. 안 그래도 돌아가는 길 중도부터 우리 일행 앞에서 걸어가던 흰색 크롭 가디건을 입은 여성들(두명 다 그런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마치 유니폼처럼)이 먼저 게장집 앞에 도착해(어쩐지 가는 길이 줄곧 겹치더라니 목적지가 같았던 거다) 점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했는데, 외국인 여행객이라 언제 다시 이 가게에 올 수 있을지 모르니 얼마 안 남은 운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 게 나을지 포장 상품만 사서 나오는 게 좋을지 재는 모양이었다. 흰 가디건을 입은 여성들은 짧은 논의 끝에 테이크 아웃 게장을 결제하러 매장에 들어갔고 유리랑 나는 다음에 오겠다며 돌아섰다. 유리한테야 차로 얼마 안 걸리는 거리고 하물며 나한테는 동네 식당이니까.

동거인을 불러내 평소에 조금 궁금해하던 다른 식당에 가서 오삼불고기 2인분과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인터넷 신문 말고 티브이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나오는 소식이 온통 소화에 방해되는 내용이었다. 오물 삐라, 동해 천연자원 시추, 전 영부인 해외순방 국고 낭비 등. 하지만 찌개에 딸려 나온 솥밥은(유리도 동거인도 당연하다는 듯 내게 솥밥을 양보해 주었다)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유리가 차를 댄 노상 공영 주차장까지 걸었다. 도중에 유리가 서련, 서련네 동네 마트 과일 컨디션 좋아? 하고 묻길래 글쎄 하고 얼버무렸다. 그 가게에서 과일을 산 적이 별로 없기도 하고 평소에 과일을 다양하게 갖춰놓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리는 수박을 사고 싶어서 물었다고 했다. 맛있을까? 난 과일에는 좀 엄격한 편이야. 마트에 들어가 입구 바로 옆 수박 코너에 서니 카운터를 보던 직원분이 눈치 빠르게 말을 건네오셨다. 냉장 수박도 있어요, 시원해서 바로 먹을 수 있어요. 저쪽에. 유리는 쌓여있는 수박들을 신중하게 보다가 한 놈을 가리켰다. 얘다. 내가 위에 있는 걸 잡을 테니 좀 꺼내줘. 동거인이 유리를 거들어줄 동안 나는 냉장과일 코너 수박 칸 바로 옆에 놓인 ‘망고 복숭아’라는 물건을 보고 있었다.

조수석에 수박을 싣고 안전벨트까지 채워준 후에 주차장 옆 길에서 셋이 담배를 피웠다.

모친이 전화를 걸어와 동생 결혼식 날짜를 알려줬다. 상견례 날짜도 알려줬지만 상견례는 부모님과 당사자들끼리만 하기로 했다며 신경쓸 필요 없다고 했다. 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라. 네 동생 결혼식 날짜나 장소 아빠가 알게 되어서 코빼기라도 비치면 네 동생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모친이 왜 나한테 입단속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나는 아빠 전화번호도 몰라. 아빠도 내 전화번호 모를걸. 사실은 이 통화가 가장 먼저였다. 나는 이 통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곧 잊고 ‘작가의 방’ 전시에 보낼 물건들을 가방에 담았다.

이건 모두 어제 일이고 오늘은 별일 없었다. 보자. 에이전시 실장님 전화, 신간 나올 출판사 편집자님 연락 등이 있었다. 주말에 라이브 커머스 어플로 주문한 냉동식품 택배가 왔다. 유리가 저녁에 보내온 연락에 따르면 어제 그 게장집에서 기어이 저녁 식사를 했는데 맛이 더럽게 없었다고 한다. 유리 부부 말고는 모두 외국인 손님이었는데, 그들을 향해 게장은 원래 이런 맛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고. 유리한테는 말 안했지만 덕분에 돈 굳었군, 하고 생각했다. 나는 어제 문구숍에서 사만삼천원이나 썼으니 돈을 좀 아껴야 한다.